《 한국 다문화의 미래는 다문화 청소년들에게 달려 있다. 다문화 청소년들이 미래의 희망을 꿈꾸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다문화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미래를 가꿔 나갈 수 있도록 역량을 키워주는 일. 바로 직업 교육, 진학 교육과 같은 진로 지도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꿈을 꾸기 어려운 상황이다. 2009년 여성가족부의 다문화 가정 실태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 자녀를 둔 결혼이민자의 73.5%가 자녀 교육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학원비 마련, 예습 복습 등의 학습 및 숙제 지도 등의 어려움이었다. 상급학교로 갈수록 진학률이 저조하고 미취학 자녀를 위한 인적 물적 인프라도 미흡하다. 》 ○ “꿈의 시작은 정서적 안정”
지난해 7월 ‘LG와 함께하는 동아 다문화상’ 청소년 부문을 수상한 양정민 씨(20). 필리핀에서 태어나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와 함께 한국에 건너왔다. 당시 충남 천안시 중앙고 3학년이었던 그는 “체육교사가 돼서 청소년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며 미래의 꿈을 실현하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나사렛대학에 입학해 특수체육을 전공하면서 체육교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 내년엔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치를 예정이다.
양 씨가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가정의 안정된 분위기였다. 천안다문화가족지원센터 최병량 팀장은 “정민이는 심리적으로 안정돼 있다. 그 안정은 가정, 그러니까 엄마한테서 나온다”고 했다. 이어 최 팀장은 “충분한 준비 없이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어린 나이에 곧바로 임신하고 긴장과 걱정 속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이래선 안 된다. 그 정서 불안은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고 덧붙였다.
고선주 한국건강가정진흥원장은 “우리 사회가 다문화 가정의 부모들에게 자녀를 강하게 키울 수 있도록 힘과 자긍심을 주어야 한다. 부모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사각지대 중도 입국 청소년의 꿈”
5일 오전 서울 중구 수표동 서울청소년수련관에서 중도 입국 청소년 20여 명이 3개 반으로 나뉘어 한국어 교육을 받고 있었다.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아 무지개청소년센터가 추진하고 있는 레인보스쿨의 하반기 개강수업이다.
중국에서 온 장훙즈(張紅智·17) 양은 “열심히 한국어를 배워 고등학교 마치면 여행가이드가 되고 싶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온 팜반마잉 군(18)은 “빨리 고등학교, 대학에 가고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중도 입국 청소년은 한국인과 재혼하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온 청소년. 이들은 인권과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실태 파악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레인보스쿨은 중도 입국 청소년들이 꿈을 만들어 나가는 곳이다. 한국어 교육과 각종 적성 교육, 편입학 지도 등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 부산, 인천, 광주, 경기 수원과 안산, 전북 익산, 충북 청주, 제주에서 600여 명이 참여한다.
2008년 한국에 들어온 베트남 출신의 투퀸 씨(22)는 올 상반기 서울지역 레인보스쿨을 수료했다.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해 올 7월 한국어능력시험 3급에 합격했다. 지금은 빵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입시를 준비 중이다. 최근엔 임인지라는 한국 이름으로 개명해 빠르게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있다.
○ “체계적인 진로 지도 필요”
지난해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국내 다문화 청소년과 면담을 한 바 있다. 이때 고등학생 서모 양(어머니가 몽골 출신)은 이렇게 말했다.
“제과 제빵 기술하고 컴퓨터 쪽에 다문화 가정 청소년을 위한 교육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쪽은 취업 분야가 좀 넓잖아요.”
다문화 청소년의 진로 지도도 중요하다. 중도 입국 청소년은 특히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레인보스쿨에서 만난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라고 고백했다. 여건상 불가능한 현실이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지난해 펴낸 ‘미래 한국사회 다문화 역량 강화를 위한 아동청소년 중장기 정책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진학이나 진로 설정을 위해 정보가 필요할 때 전문적으로 안내해 줄 단체가 필요하다. 그래야 이들이 사회에 기여할 길도 열린다”고 강조했다.
성의 있고 진지한 지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무지개청소년센터의 김재우 다문화역량강화팀장의 말.
“직장 잡을 나이가 된 중도 입국 청소년들이 더 걱정입니다. 조금만 더 도와주면 더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있는데, 일반 사무직도 가능한데, 우리는 지나치게 단순 노무직이나 기능직만 생각하지요. 다문화 청소년들을 단순 노동인력으로만 보아선 안 됩니다. 전문적인 교육과 진로 지도로 선택의 폭을 넓혀 주어야 합니다.”
이 밖에 이중 문화나 이중 언어의 배경을 살리는 진로에 대해서도 지도가 필요하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최근 이민자들은 국경 및 국적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가는 경향이 많다. 이중 언어를 무기 삼아 글로벌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꿈을 키워 주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김영화 원장이 들려주는 ‘다문화 자녀 키우는 법’ ▼ “어릴 때부터 다문화의 자부심 심어줘야”
“병원에 상담하러 오는 다문화 가정 자녀들은 대부분 비슷한 증세를 보입니다. 청소년의 경우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학습장애와 이로 인한 등교 거부, 따돌림입니다. 유아의 경우 자폐증과 유사한 ‘유사자폐’죠.”
김영화 강동소아정신과의원 원장(사진)은 “어릴 때의 언어발달장애나 유사자폐 증세가 청소년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청소년기가 되어 병원에 찾아오게 하는 학습장애나 어릴 때의 유사자폐 모두 어머니와 아이의 애착 형성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5년 전부터 상담을 받으러 오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늘면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심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거나 번역서 ‘다문화 사회와 아이들’을 내는 등 다양한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김 원장은 “다문화 가정에서 엄마의 모국을 이해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엄마로서는 서툰 한국말로 아이를 돌볼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애착 형성이 힘들어진다”며 “애착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아이의 언어발달이 늦어지고 청소년기의 학습장애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최근 한 달간 치료를 받은 아동을 사례로 들었다. 이 아이의 엄마는 한국인, 아버지는 필리핀계 미국인이었다. 시집에서 “영어도 할 줄 모르냐”며 구박을 받아온 엄마는 한국어로 아이를 돌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아이와 집 밖에서는 제대로 대화도 하지 못했다. 결국 아이는 유사자폐 증세를 보였고 미국에서 여러 치료를 받았지만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다.
김 원장은 “엄마 아빠의 국적만 바꾸면 우리나라 다문화 가정과 똑같은 상황”이라며 “엄마와의 애착관계를 새롭게 형성하면서 많이 나아졌다. 엄마가 돌아가며 ‘앞으로는 아이와 한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그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유럽과 호주 등 일찍부터 다문화 사회를 맞은 국가의 경우 이 같은 문제를 미리 방지한다. 김 원장은 “독일의 경우 모든 발달이 정착되는 세 살까지는 매년 나라에서 언어발달 수준을 확인하고 늦다고 판단될 때는 국비로 치료한다”며 “유아기 언어발달만큼은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이미 학교나 가정에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문화 가정 청소년의 경우 자신의 문화정체성에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은 어머니의 나라와 아버지의 나라 두 가지 문화정체성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복잡한 문제에 부닥치고, 내 뿌리는 어디인지 고민하며 또래집단과 동질감을 느끼기도 어려워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두 가지 정체성에 모두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죠. 예를 들어 어머니 나라가 베트남이라면 그 나라는 어떤 점이 좋은지, 위인은 누가 있는지 알려주는 겁니다. 병원에 오면 늦습니다. 치료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죠. 학교와 가정에서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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