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장예은 양(17·경기 분당중앙고 2학년)은 한밤중에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외국어고 입시에 대비해 12시간을 공부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슷한 성적의 다른 친구들이 준비하기에 덩달아 뛰어든 외고 입시. 이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외고에 가야 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장 양은 초등학교 때부터 늘 상위권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남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마음만으로는 공부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변해버린 자신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다 보니 신경성 위염 증세까지 생겼다. 결국 외고 진학을 포기한 장 양은 중3 2학기에 공부를 손에서 놔 버렸다. “전교 10등에서 전교 100등 밖으로 떨어졌어요.” 한 번 공부에서 마음이 떠나니 성적 하락은 걷잡을 수 없었다.》
고교에 진학한 뒤에도 장 양의 슬럼프는 계속됐다. 수업 내용이 어려워지고 공부해야 할 분량이 늘어난 만큼 고민도 깊어갔다.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공부가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사, 외교관, 의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직업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장 양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지만 막연한 상상만 할 뿐 ‘이게 내 길’이라는 확신은 가질 수 없었다. 중학교 때 하던 고민을 아직까지 끌어안고 있는 게 속상해 울고 싶었다.
1학기가 끝난 뒤 받아든 성적표는 3, 4등급투성이었다. 1등급을 받은 과목은 특기인 영어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니 왜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오더라고요. 슬럼프였다는 핑계를 댈 수는 있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거잖아요. 다음 학기에는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장 양의 의지에 불을 지펴준 것은 여름방학 중에 참가한 중고교생 대상 모의국제회의였다. 우연히 참가한 대회에서 장 양은 새로운 꿈의 실마리를 찾았다. 장 양이 속한 조에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의 교육여건을 개선시킬 방안을 모색하라’는 의제가 주어졌다. 조 대표로 나선 장 양은 ‘교환학생 숫자를 늘려 선진교육을 받을 기회를 넓힌다’ ‘정기적 기부를 유도해 교육시설을 확충한다’는 방안을 영어로 발표했다. 국제적 이슈를 두고 영어로 토론하는 것, 조원들과 협력해 만든 해결책을 발표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 넘치는 일이었다. 그의 가슴에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망이 싹텄다.
대회에서 느낀 점을 신나게 늘어놓는 장 양에게 어머니는 유엔에서 일하는 국제변호사를 소개하는 신문기사 스크랩을 보여줬다. 논술담당 선생님과 진로 문제를 상담하자 국제변호사가 되기 위해선 어떤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장 양의 새로운 꿈이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1학년 1학기에는 곧잘 결석했던 야간자율학습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뒤에도 학교 인근 도서관에서 밤 12시까지 공부했다. 수업에서 배운 내용은 반드시 그날 복습했다. 시험기간에는 교과서를 4, 5번 반복해서 읽었다.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배운 내용이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았다. 서술형 문제를 대비해 필기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옮겨 적기도 했다.
1학년 2학기에는 대부분의 과목 성적이 1, 2등급으로 뛰어올랐다. 수학 성적은 4등급에 그쳤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수학은 단기간에 성적이 오르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망하는 대신 공부법을 바꿔 보기로 했다.
1학년 겨울방학부터 장 양은 수학 인터넷 강의를 수강하기 시작했다. 휴대용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를 구입해 학교에서도 틈틈이 들었다. 문제집을 여러 권 푸는 대신 인터넷 강의 문제집 한 권만 반복해서 풀었다. 예전에는 틀린 문제를 다시 풀지 않고 지나쳤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풀고자 노력했다.
공부 계획도 더욱 꼼꼼하게 짰다. 각 수업의 숙제는 무엇이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엔 무엇을 공부할지 빠짐없이 적었다. “예전에도 계획을 짜긴 했지만 하루 동안 해야 할 일을 뭉뚱그려 적은 탓에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실천에 옮기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젠 계획을 정말 제대로 실행해보고 싶었어요.”
꾸준히 노력한 결과 2학년 1학기에는 수학뿐 아니라 전 과목 내신이 1등급으로 뛰어올랐다. 2학년이 된 장 양은 단짝 친구 두 명과 함께 교내 동아리를 만들었다. 모의국제회의 출전을 준비하는 고교 동아리연합에 소속돼 대회를 준비한다. 지난해에는 수상하지 못했지만 다음 대회에서는 당당하게 상을 받겠다는 의욕이 넘친다. 동아리 활동을 할 때마다 국제변호사의 꿈에 조금씩 다가가는 기분이 든다.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재미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공부 시간을 늘려야겠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장 양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목표를 지닌 자의 흔들림 없는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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