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경찰서 기관실에서 근무하는 ‘또 다른 천사’ 김영식 행정관은 왼손 손가락이 모두 없다. 그는 150만 원의 월급으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다섯 명의 장애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서울 성북경찰서 지하 2층 기관실. 대낮에도 어둡고 습한 이곳에 또 한 명의 ‘기부천사’가 숨어 있다. 기관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는 김영식 씨(48)다.
김 씨는 왼손 손가락이 하나도 없다. 남들보다 부족한 다섯 손가락 대신 그에겐 사랑으로 후원해 온 다섯 명의 장애아동이 있다. 29일 기관실에서 만난 그는 “너무 적은 돈을 기부해 부끄럽다”면서도 기부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1983년 김 씨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강원 홍천군에서 상경했다.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고 싶어 스물한 살 되던 해 서울의 한 플라스틱 공장에 취업하고 방송통신대에도 입학했다. 주경야독하던 그는 기말고사를 앞두고 대학 강의 테이프를 들으며 작업하다가 그만 사출기(射出機)에 왼손을 넣었다. 그 순간 손가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병원에서는 갈고리 손조차 끼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던 공장마저 부도가 났다. 갈 곳이 없던 그는 지인의 소개로 1997년 종로경찰서에서 보일러 난방을 관리하는 임시 기능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평소 늘 웃는 밝은 성격이지만 장애로 인한 스트레스는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동안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좌절했던 그에게 ‘새로운 삶’의 문을 여는 계기가 찾아왔다. 손의 통증을 참기 위해 담배를 끊기로 결심한 2000년 어느 날이었다. 김 씨는 “담뱃값을 허튼 데 쓰기보다는 나처럼 마음고생할 장애아들을 돕는 데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했다. 이날로 김 씨는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천사보육원에서 근무하던 처제에게 장애아 2명을 추천받아 후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한 달 월급은 120만 원 남짓. 부인과 두 아들을 부양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지만 지금까지 아이 한 명당 한 달에 1만 원씩 11년을 꼬박꼬박 보내주고 있다. 돈이 적다고 사랑까지 작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까 봐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후원아동들은 아직도 그의 얼굴과 이름을 모른다.
넉넉하게 후원해 주지 못해 미안했던 그는 후원아동들에게 본보기라도 돼야겠다는 생각에 ‘정규직 공무원’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일하면서 틈틈이 보일러취급사와 가스기능사, 방화관리자, 위험물 관리 자격증을 땄다. 손을 다친 이후 덮었던 책도 다시 펼쳐 2004년 18년 만에 방송통신대 졸업장도 받았다.
결과는 노력을 배신하지 않았다. 2008년 경기지방경찰청의 장애인 공채에서 그는 27 대 1의 경쟁을 뚫고 정규직 공무원이 됐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매년 월급이 4만7000원씩 오르는 점이 가장 설렜다. 더 많은 아동을 후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두 명을 후원해 오던 그는 2009년에는 3명, 2010년에는 4명, 올해에는 5명으로 후원아동을 매년 한 명씩 늘렸다. 천사보육원 외에 경기 의정부시 용현동의 ‘그루터기 장애인학교’, 안산 상록구 월피동의 ‘들꽃 피는 마을’ 등에서 지내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시각장애부터 소아마비까지 아픈 곳도 각각 다르다. 그는 앞으로도 매년 한 명씩 후원아동을 늘릴 예정이다.
김 씨의 기부활동은 가족의 마음에도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처음에는 적은 월급에 기부까지 하는 게 미안해 가족에게 기부 사실을 숨겼다”며 “다행히 가족들이 내 뜻을 이해하고 따라줬다”고 말했다. 그의 휴대전화 단축번호 1번에 ‘천사’라고 저장돼 있는 부인 이경희 씨(46)는 매일 오전 4시에 출근해 12시간씩 빌딩 청소 일을 하며 100만 원의 월급을 받는다. 이 씨도 매달 1만5000원의 후원금을 복지재단에 보내고 있다.
장애가 생긴 이후 마음을 다스리려고 시를 써왔다는 김 씨는 다음 달 자신의 첫 시집을 출간한다. 그는 “책이 잘 팔려서 인세를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후원아동 수를 늘리고 싶어서다. 꿈과 함께 이웃사랑이 커지는 김 씨의 마음은 ‘사랑의 화수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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