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공개한 제일저축은행의 유흥업소 여종업원에 대한
담보 부실 대출 관련 자료.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지난해 4월 서울 강남구의 H룸살롱. 업주 이모 씨(39)가 종업원 이모 씨(28·여)에게 ‘마이킹’으로 1200만 원을 줬다. 마이킹은 유흥업소 업주가 종업원들에게 선불 계약금 형식으로 빌려주는 돈을 뜻하는 속어.
한 달 뒤 업주는 종업원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서류에는 실제 받은 돈의 10배 이상인 1억3000만 원을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업주는 “누가 물어보면 서류에 쓰인 대로 받았다고 말해야 돼. 책임은 내가 지니까 걱정하지 말고…”라고 했다. 이 씨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서류에 사인했다. 업주는 같은 방식으로 종업원 37명에게 선불금 2억 원을 주고 30억 원을 준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
같은 해 6월 업주는 ‘뻥튀기 채권 서류’를 들고 강남 유흥업계에 소문난 ‘부실 대출 알선 브로커’ 김모 씨(56)를 찾아가 20억 원의 대출을 부탁했다. 금융채무 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인 업주는 합법적인 대출이 불가능했다. 김 씨는 “제일저축은행에 ‘강남 유흥업소 특화 상품’이 있는데 대출 금액의 3%를 수고비로 주면 연결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업주 이 씨가 조건을 받아들이자 김 씨는 제일저축은행과 계약한 대출 모집업체를 찾았다. 그는 “30억 원 선불금 채권을 담보로 20억 원을 대출받으려는 사람이 있는데 대출 금액의 3%를 수수료로 달라”고 요구했다. 양쪽에서 3%씩, 6%의 수수료를 받으려는 것이었다. 김 씨는 이런 방식으로 30개 유흥업소 업주에게 대출을 알선해 7억 원을 챙겼다.
서류는 서울 송파구 가락동 제일저축은행 본점으로 넘겨졌다. 대출 담당 직원은 일반 은행 직원들과 달랐다. 신용 및 상환 능력, 매출 등을 꼼꼼하게 검토하는 은행 직원들과 달리 30억 원 채권 서류만 보고 도장을 찍었다. 곧바로 20억 원 대출이 성사됐다.
업주는 대출금을 개인 빚 상환, 유흥비 등으로 탕진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업주가 변태영업을 한 혐의로 구속돼 가게가 문을 닫으면서 대출 연체가 시작됐다. 상황을 파악한 종업원 이 씨는 “난 1200만 원만 빌렸다. 서류는 허위다”라고 호소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이 씨를 비롯한 종업원들은 자신이 빌린 돈의 10배가 넘는 돈을 고스란히 갚아야 할 상황이다.
이런 일은 H업소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2009년 3월부터 올해 1월까지 선불금을 부풀린 서류를 이용해 ‘강남 유흥업소 특화 상품’ 대출을 받은 업주는 모두 93명, 부실 대출 규모는 1546억 원에 이른다. 대출받은 73개 업소 중 업주가 신용불량자인 곳도 36곳이나 됐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부실 대출을 해준 혐의(업무상 배임) 등으로 제일저축은행 전무 유모 씨(52) 등 임직원 8명과 서류를 허위로 작성한 혐의(사기)로 유흥업소 업주, 브로커 김 씨 등 100여 명을 검거했다고 30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일부 업주는 사채업자 윤모 씨(58·여)에게 수수료를 주고 주부나 학생을 모집해 이들이 종업원인 것처럼 허위 ‘마이킹 서류’를 작성하게 한 뒤 대출을 받기도 했다.
제일저축은행은 서류만을 담보로 폐업한 업소나 아직 개업하지 않은 업소, 양은이파, OB파 등 조직폭력배가 운영하는 업소 등에 많게는 197억 원까지 대출해주기도 했다.
제일저축은행은 최근 부실 저축은행으로 지정돼 영업정지됐다. 지난달 28일에는 이용준 행장(52)과 장모 전무(58)가 고객 명의를 도용해 1400억 원을 불법 대출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경찰은 유흥업소 부실 대출 과정에서 결재권자인 이 행장이 개입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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