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서울 강남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그녀. 일명 ‘부킹’을 통해 알게 된 사이지만 상관없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빛과 청순한 얼굴이 아직도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는 사실만 중요하다. 그렇게 예쁜 그녀가 “오빠는 인상이 좋아 왠지 마음이 간다”면서 “계속 만나고 싶다”고 그런다.
그래서 하루가 지난 오늘, 그녀에게 저녁이나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답장이 왔다. 저녁에 만나잔다. 배는 고프지 않으니 술 한잔 간단하게 하자는 그녀. 장소도 직접 정했다. 오후 8시에 역삼역 ×번 출구 앞에서 보자면서 근처의 분위기 있는 괜찮은 바를 안다고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갔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다시 보니 내가 더 마음에 든단다. 그러고선 그녀가 안다는 그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바 안은 조용하고 어두침침했다. 난 맥주를 시켰지만 그녀는 양주가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냥 “알았다”고 했다. 내가 화장실을 간 사이 안주까지 시켰다. 한 시간쯤 있었을까. 10만 원 정도를 생각하며 계산서를 받았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무려 78만 원. 안주 하나에 15만 원, 양주는 한 잔에 8만 원이었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화를 낼 수 없었다. 옆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내 얼굴만 바라보는 그녀 때문에.
가게를 나오자 그녀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전화를 받더니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가야 한단다. 그녀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다. 그렇게 바람처럼 사라졌다.
○ 이틀에 한 번 손님 물어와도 월 300만 원 벌어
사연의 주인공은 자영업을 하는 이모 씨(34). 지난달 이런 일을 당한 그는 이후 몇 번 더 그녀에게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 않았다. 지금은 아예 연락이 두절된 상황. 이 씨는 “헤어질 당시 멀어져가는 택시를 바라보며 정신이 멍했다. 지금은 ‘귀신에 홀린 게 이런 기분일까’ 생각이 든다”며 한숨을 쉬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서울 유흥가를 중심으로 속칭 ‘바 알바(아르바이트의 준말)’에 당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바 알바’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모가 뛰어난 20대 여성. 이들은 나이트클럽 등에서 남자를 만나 자신이 아는 술집으로 유인한 뒤 바가지를 씌워 매출을 올려주고, 그에 따른 수당을 받는다.
올해 8월 서울 마포경찰서는 유흥가가 밀집한 서울 마포구 서교동 ○○바의 주인 김모 씨(28)를 사기 혐의로 구속하고, 또 다른 바의 주인 정모 씨(31) 등 7명을 입건했다. 또 이들과 짜고 손님을 유인한 아르바이트 여성 17명도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인근 클럽 등에서 남자를 유혹한 뒤 “잘 아는 술집이 있다”면서 문제의 바들로 데려왔다. 그리고 비싼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는 몰래 가게를 빠져나갔다. 20대 대학생이 대부분인 이들은 손님을 한 번 데려올 때마다 10만∼15만 원을 수당으로 챙겼다. 경찰은 “적발된 술집 두 곳은 이 같은 수법으로 약 6개월 동안 2억5000여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고 밝혔다.
이런 ‘알바’들을 고용하는 가게는 최근 급속도로 늘고 있다. 서울 강남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서울 강남 일대 유흥가를 중심으로 퍼져 있던 ‘바 알바’ 업소들이 최근 전국적으로 10배 이상 늘어난 걸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O₂는 역삼동의 한 바에서 ‘바 알바’ 일을 한다는 한 여성과 연락이 닿았다.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이 여성은 원래 바텐더 일을 했다고 했다. ‘바 알바’ 일을 시작한 건 6개월 전쯤부터. 일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쉽게 돈을 벌 수 있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따로 가게에 묶여 일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또 이틀에 한 번 손님을 ‘물어와도’ 보수가 높은 강남에선 한 달에 300(만 원)은 거뜬하고. 술을 많이 마실 필요도 없죠.”
죄책감은 없을까. 그녀는 “처음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젠 무덤덤하다. 어쩔 땐 스릴까지 느낀다”고 말했다. 또 “어차피 남녀 사이란 결국 다 속고 속이는 거 아니냐”는 설명도 ‘친절하게’ 덧붙였다. “예전엔 혼자 했다면 이젠 ‘팀플레이’를 많이 해요. 2 대 2로 작업을 해서 손님을 끌어온다는 얘기죠.”
동아일보DB ○ ‘횟집 알바’는 물론 ‘파스타집 알바’까지
한편 ‘바 알바’에 대한 얘기가 어느 정도 알려지자 이제는 다른 업종에서도 비슷한 속임수가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횟집 알바’.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던 유학생 전모 씨(30)는 나이트클럽에서 알게 된 20대 여성과 며칠 뒤 다시 만났다. 여성의 제안에 따라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참치횟집에 갔다. 메뉴판을 봤더니 가격 대신 ‘시가’라 적혀 있었다. 많아봐야 1인당 5만 원 정도로 예상하고 정식 2인분을 시켰다. 평균 수준의 참치회를 먹고 나온 그는 계산서를 보고 입이 벌어졌다. 참치 1인분에 15만 원, 사케 한 잔에 3만 원, 종업원 수고비 명목으로 2만 원…. 계산서엔 총 44만 원이 적혀 있었다. 얼마 뒤 연락을 했더니 이미 그 여성의 번호는 없어진 상태였다.
‘횟집 알바’는 그나마 양반에 속한다. ‘곱창집 알바’ ‘파스타집 알바’ 등까지 그 유형이 계속 진화하고 있다. ‘알바’ 음식점의 경우 상호도 유명 음식점과 비슷하게 만들어 피해자들의 시야를 흐린다. 이처럼 피해가 속출하자 유흥업소 정보를 공유하는 몇몇 웹사이트에선 회원들끼리 ‘피해 사례’를 공유하고, 아예 ‘알바 구분 요령’이란 매뉴얼까지 만들어 대처할 정도다.
게다가 이젠 여성도 안심할 수 없다. 바에서 ‘꽃미남’ 남성들을 고용해 여성들을 꾀어 바가지를 씌우기 때문이다. 실제 얼마 전 서울 강남에선 이런 방식으로 업소를 운영한 업주가 붙잡혔다. ‘알바’로 뛴 젊은 남성 2명에게서 한 달 동안 피해를 당한 여성은 26명. 피해액만 2400만 원이 넘었다.
○ 수상하다 생각되면 자리 박차고 나와야
문제는 ‘알바’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지만 처벌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서울 강남경찰서 지능팀의 이명정 팀장은 “주점이나 음식점에서 단지 술과 음식을 비싸게 팔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하긴 힘들다”고 토로했다. 업소에서 처음 보여준 메뉴판과 나중 메뉴판이 다른 ‘이중 메뉴판’을 사용했다든지, 마시지 않은 술값을 청구했다면 모를까 단지 ‘비상식적인 가격’을 요구했다는 것만으론 범죄 혐의를 두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 마포경찰서 지능팀의 김영일 팀장은 “업주와 여성들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다면 사기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업주들이 돈을 주고 여성들을 고용해 그로부터 부당 이득을 취한 사실을 증명한다면 업주를 구속까지 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알바’들은 대부분 타인 명의로 된 ‘대포폰’을 사용한다. 또 여러 개의 가명을 돌려쓰기 때문에 추적 자체가 쉽지 않다. 이들은 경찰에 잡힐 경우에 대비해 업주로부터 진술 방법 등에 대한 교육도 철저하게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술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힘들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일단은 본인이 주의하는 수밖에 없다. 김 팀장은 “일단 메뉴판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의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휴대전화로 찍어 두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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