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안의 또 다른 인천이 부평이라고 말한다. 택시도 부평 따로, 인천 도심 따로 운행해 웃돈을 줘야 타던 적이 있었다. 인천시와 부평시가 따로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평의 정서는 인천 안에서 독특하다. 이런 경계를 문화사업으로 깨뜨린 대표적인 인천의 원로가 있다. 부평 토박이 허문명 전 부평문화원장(72)이다.
“인천은 조선시대에 철마산을 두고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로 나뉘어 있었지요. 농경문화의 중심인 부평과 해양문화 중심인 인천이 오랫동안 이어와 서로 다른 정서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근대화를 거치면서 부평은 산업단지 등 경제 중심으로, 인천 도심은 행정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제는 서로 보완하는 하나의 인천만이 존재합니다.”
그는 늘 소통과 배려를 강조한다. 생활권이 다르고, 인맥이 달랐지만 그는 인천 도심과 부평을 넘나들며 인적 네트워크를 이어왔다. 2002년 문화원장 재임시절 지인들을 찾아가 지역문화 활성화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기부운동 동참을 호소했다. 지방에서는 낯설었던 기업 메세나 운동을 펼쳤다. 인천 소재 기업은 문화단체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문화단체는 예술 인프라를 제공해 기업의 문화 활동을 도왔다. 문화단체에 경제적 안정과 기업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키는 윈윈 전략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또 두 달에 한 번씩 문화계 명사를 초청해 여는 ‘아침 문화강좌’를 7년여 동안 이끌며 교양과 인적 교류의 장을 마련했다.
“지역 문화원의 재정은 열악합니다. 원장은 무보수 명예직이고 직원도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급여를 받지요. 일본에 우리 문화원과 같은 성격의 공민관이 1만8000개가 있는데 공무원이 3, 4명씩 상주하며 관리합니다. 일본 각 마을의 대표건물이 공민관이지요. 기부에만 의존해 운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에서 문화원장들이 나이가 많다며 40, 50대의 유능한 전문인을 고용하려 하지만 원장을 안 하려 합니다. 그 나이 때는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죠. 직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치단체장마다 풍요로운 경제와 문화를 얘기하지만 향토사 개발이나 문화 창작에 대한 예산 지원은 빈약한 것이 현실이다. 그가 찾은 대안이 ‘문화 사랑방’ 사업이었다. 매주 1회씩 부평동과 부개동에 주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165m²(약 50평) 안팎의 소극장을 마련해 양질의 공연을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찾아가는 공연으로 시민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워줬다. 각 지역 문화원에서 벤치마킹해 가기도 했다. 2004년에 240여 개의 문화원 가운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최우수 문화원이란 결실을 거두고 2007년엔 지역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로 지정됐다.
“인천을 대표할 상징적인 축제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1997년부터 해마다 5월에 개최하는 ‘인천부평풍물(風物)축제’가 그것입니다. 초대 추진위원장을 맡아 부평지역의 농경문화를 재현하고 전통문화인 풍물을 발굴하여 축제를 열었지요. 인천시민이 공유할 축제로 정착시킨 것이 일생에 가장 큰 보람입니다.”
그는 문화예술 분야 공무원들의 교체가 너무 잦아 전문가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공직자의 문화 마인드를 강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려 할 때 프랑스는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있음에도 문화재를 보호하려고 독일군의 무혈입성을 허용했습니다. 중국 내전 때 장제스는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후퇴하면서 문화재를 싣고 떠났지요. 결국 중국의 문화를 지킨 것입니다. 지역문화예술의 발전은 공직자의 문화적 소양과 애정에 좌우됩니다. 자치단체는 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지원해야 합니다.”
본인이 인천과 부평의 경계를 허무는 데 일조했다면 다행이라며 마무리에도 화합을 강조했다. “인천은 어머니입니다. 모든 것을 품는 곳이지요. 특정 지역도, 특정 인맥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출신은 따지지 않는 참여와 기회가 공존해야 합니다. 인천 사람으로서 주인의식과 자긍심이 필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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