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학교 시험이 끝날 때마다 곧바로 이어지는 채점 정정기간은 마치 폭풍처럼 지나갔다. 이유인즉슨 이랬다. 외국어고 자기주도 학습전형 원서 접수를 앞둔 상위권 중3들이 시험점수 1, 2점 차이로 영어 내신등급이 갈리는 상황. 잔뜩 예민해진 일부 학생들은 교무실로 찾아와 오답을 정답으로 인정해 달라거나 서술형 답안에서 부분점수를 요구하곤 했던 것이다.
특히 서술형 답안에선 출제의도엔 어긋나지만 정답과 의미가 통하는 ‘애매한’ 유사답안들이 쏟아졌다. 이런 유사답안들은 뜻이 맞고 문법상 오류가 없으면 정답으로 인정해줬다. 하지만 개중엔 ‘막무가내’ 정정 요구도 있었다. 외국 거주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적잖다 보니 문법적으론 맞지 않는 구어체 표현을 가지고 “제가 미국에서 살 땐 이런 말도 썼어요”라며 잠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때론 학부모까지 동원돼 “아는 교수에게 물어보니 이렇게도 쓴다더라”는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진땀을 뺀 순간도 있었다. 정답이 ‘∼such a nice car that∼’인데 ‘∼such a very nice car that∼’이라고 써서 틀린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인터넷에서 ‘such’ ‘very’ ‘nice’가 모두 함께 들어간 예문을 찾아 출력해 와선 자신이 쓴 답도 정답으로 인정해주기를 요구했다. 깜짝 놀라 정확한 문법적 쓰임을 알아봤다. 그 결과 ‘such∼that’ 구문에서만큼은 ‘very’라는 부사를 쓰지 않는 것이 어법에 맞았다. 학생에겐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는 문장이 아니라, 공신력 있는 사전이나 영자매체에서 용례를 찾아오면 정답으로 쳐주겠다”고 했다. 결국 그 학생은 용례를 찾아오지 못했다.
이렇게 내신에 민감한 학생, 학부모와 시험 때마다 맞서다 보니 모든 영어과 교사들이 덩달아 예민해졌다. 더욱 꼼꼼해졌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안 되니 말이다.
이번 중간고사를 출제할 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들도 이렇게 힘들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험일 3주 전부터 출제에 들어갔다. 영어과 교사 서너 명이 각자 시험문제를 분담해 출제한 뒤 2주 동안 매일 교차 확인을 했다. 다른 교사가 낸 문제 중에서 혹시라도 오류가 있거나 중복 답안이 가능하진 않은지 보고 또 봤다. 서술형 문항을 두고 정답 외에 어떤 유사답안들이 나올 수 있는지 다 같이 대여섯 번 모여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가능하면 최대한 채점 후 잡음을 없애기 위해 유사답안이 나오기 어려운 방향으로 문제를 교정해 갔다.
사전 속 용례뿐 아니라 고교 수준의 문법서도 ‘쥐 잡듯이’ 뒤져 시험 지문과 관련된 모든 예문을 살펴봤다. 거의 밤을 새운 날도 있었다. 덕분에 오류가 날 뻔한 문제를 잡아내기도 했다. ‘smoking room’은 중학 수준에선 ‘담배를 피우기 위한 방’으로 해석돼, 여기서의 ‘smoking’은 동명사로 분류된다. 그런데 고교 단계의 문법서를 읽다가 동일한 구문이 ‘연기가 나고 있는 방’으로 해석된 예문을 발견했다. 아차! 그럼 이때의 ‘smoking’은 현재분사로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다음 중 동명사가 아닌 것’을 고르는 문제에서 보기로 제시됐던 ‘smoking room’을 다른 구문으로 대체했다.
바짝 긴장한 채로 에너지를 쏟아 부은 덕일까. 다행히도 이번 중간고사가 끝나고는 별다른 항의가 없었다. 서술형 답안에서 실수로 철자를 틀려 부분점수라도 달라고 찾아오는 학생 몇 명뿐이었다. 딱하긴 해도 변별력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겨우 한숨 돌리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3학년 시험이 3주 앞으로 다가왔다. 3학년은 특목고 입시 일정에 맞춰 마지막 기말고사를 앞당겨 보기 때문이다. 특목고 진학이 목표인 3학년은 특히 마지막 시험에 가장 민감하다.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시험 출제에 돌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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