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통]“16년간 나는 ‘사망자’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19일 03시 00분


어릴적 부모잃고 백부에 입양… 백부 숨진뒤 연락끊겨 호적정리
44세 절도재판중 주민증 부여

“저는 법적으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16년 전부터 이모 씨(44)는 ‘사망자’ 신분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숨졌다. 어머니도 갓난아기를 두고 떠났다. 이 씨는 할머니 손에서 젖 대신 막걸리 지게미를 먹으며 자랐다. 이 씨가 스무 살 되던 해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 씨는 혼자가 됐다.

이 씨가 11세 때 큰아버지는 이 씨를 자신의 아들로 출생 신고했다. 하지만 1992년 이 씨의 큰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들은 연락이 닿지 않는 이 씨의 호적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때 이 씨는 절도죄로 안양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이 씨도 모르는 사이 법원에서 실종선고심판이 확정돼 이 씨는 1995년 5월 15일 ‘망자(亡者)’가 됐다.

“출소한 뒤 막노동이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그곳에서도 신분증을 요구했습니다.” 생계가 막막했던 이 씨는 다시 범행을 저질렀다. 1986년 첫 수감 이후 지금까지 그는 19년 6개월여를 교도소에서 살았다. 올해 5월 30일 출소한 뒤 21일 만에 이 씨는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한 빌딩 앞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잠을 자고 있는 취객의 지갑을 훔치려다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이 씨는 재판 과정에서야 ‘사망자’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김형두 부장판사와 변론을 맡은 남현우 국선전담변호사의 배려로 이 씨는 8월 주민등록번호를 갖게 됐다.

18일 서울중앙지법에서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절도 혐의로 기소된 이 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검찰은 기구한 이 씨의 사연을 감안해 최대한 형량을 낮춰 징역 3년을 구형했다. 배심원단도 유죄 인정에 징역 3년 의견을 내놓았다. 재판부도 배심원단 평결과 같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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