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가 막힌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싶어 물끄러미 천장만 쳐다본다. 한 번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두 번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첫 수술 때 얻은 흉터가 아직도 선명한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믿고 싶었다. 열흘쯤 지나자 더는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의사는 곧바로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 두 번째 수술에 들어가던 날, 2008년 가을
전신마취를 또 할 테지. 이제 50대 중반이 되어서일까. 지금 수술실에 들어가면 왠지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 같다. 영영 못 깨어나면 어쩌나.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우리 불쌍한 태경이 아빤 누가 돌봐줄까. 이제 겨우 살 만해졌는데. 죽기 전에 손주 녀석이라도 한 번 안아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는데.
오직 하나만 생각하자. ‘제발 깨어나게만 해주세요.’
○ 시련의시작, 1995년봄
큰아들 진호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다. 더 바랄 게 없었다. 버스 운전을 하는 남편은 성실했다. 알뜰살뜰 살아온 덕에 25평 아파트에 작은 빌라도 한 채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인 작은아들 태경이는 덩치에 맞지 않게 곰살가웠다. 이런 행복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 믿었지만….
자그마치 1억 원이었다. 남편의 월급을 쪼개고 쪼개 모아둔 돈에다 집을 담보로 빌린 미래의 꿈까지 합한 액수였다.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한여름 밤의 꿈’이기도 했다. 사람을 쉽게 믿은 게 화근이었다. 남편은 부동산 투자의 환상을 심어준 그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그가 부도를 내고 잠적해버린 뒤에도 남편은 한참이나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함께 투자한 친구의 보증까지 섰던 터라 우린 곧바로 빚더미에 앉았다.
어렵게 장만했던 아파트와 빌라를 헐값에 넘겼다. 급한 대로 빚부터 갚고 나니 사글셋집 보증금도 안 됐다. 이곳저곳에 손을 벌려 이사한 곳은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짜리 반지하. 고3인 진호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학교가 알선해 준 취업훈련소에서 금형을 배운다고 했다. 본인의 꿈보다 가족이 먼저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진호는 그런 애였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태경이도 못난 부모를 단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가겠다며 중1 때 시작한 복싱에 누구보다 열심히 매달렸다. 미안함 때문에 애들에겐 대견하다는 한마디 말도 해주지 못했다.
○포장마차, 그리고 잡곡가게, 1995∼2002년
당장 먹고살 일이 급했다. 방황하는 남편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다그칠 수도 없었다. 할 줄 아는 것도, 돈을 벌어본 적도 없었지만 핑계에 불과했다. 집 근처 떡볶이 가게에서 우선 일을 시작했다. 하루 12시간씩 서 있어도, 뜨거운 기름이 온몸에 튀어도 힘들단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네 식구가 굶지 않으려면 더한 일도 해야 했으니까. 1년쯤 지나 시작한 포장마차는 그런대로 잘 꾸려나갔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그런 생활에도 어느덧 익숙해져갔다. 장사에 묶여 군대 간 진호에겐 면회 한번 가지 못했다. 복싱선수인 태경이의 경기를 보러가는 것도 사치였다.(사실 태경이가 고등학교 때였던가. 처음 본 아들의 경기에서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을 보고는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길거리에서 번 돈으로 그렇게 4년을 버텼다.
못골시장 입구에서 잡곡가게를 하게 된 건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다. 포장마차 단골이었던 금은방 사모님이 새로 옮겨가는 건물 앞에 빈자리가 있으니 장사를 해보면 어떠냐고 권했다. 당시 포장마차를 정리하고 요구르트 배달을 하던 내겐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번듯한 건물이 아니어도 좋았다. 한 평 남짓한 공간이지만 그걸로 족했다. 큰길에서 비바람이 들이쳐도 우산 하나 받치면 거뜬했다. 오히려 시장 초입이라 장사하기엔 더 좋았다.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흑미가 얼마냐, 현미가 얼마냐 한 번이라도 더 물어봐주었으니까. 내 가게를 갖고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신이 났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땐 몰랐다. 내 몸이 점점 망가져가고 있다는 걸.
○ 첫 번째 암 선고, 2002년 초여름
갑작스러웠다.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피곤함이 계속됐다. 하혈까지 하고 나서야 덜컥 겁이 났다. 가게 문을 닫은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근처 산부인과에 갔다. 간단한 수술이 필요하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 “단 한 평 좌판의 삶, 행복-인심 나누기엔 충분” ▼
자궁경부암 진단이 내려진 건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은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1기를 지나 막 2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제야 내 병을 알게 된 남편은 다른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자궁을 들어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여자임을 포기해야 하는 그런 수술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남편은 결혼 후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사기를 당하고도 내 앞에선 절대 울지 않던 그였다. 남편의 울음소린 서럽다 못해 애처로웠다.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남편은 낮은 목소리로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했다. 불쌍한 사람. 평생 미안해했으면 됐지 뭐가 또 미안하다는 건지.
수술 전날,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시장에 나가 구두 한 켤레를 샀다. 낡은 구두가 늘 맘에 걸리던 차였다. 내가 없으면 누가 그 사람 구두라도 챙겨줄까 싶었다. 혼자서도 쉽게 찾으라고 신발장의 잘 보이는 곳에 구두를 가만히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집 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죽더라도 이 지하 방에서 우리 애들을 꺼내놓고 죽어야 할 텐데. 그날 오후 영영 집을 비울 사람처럼 방바닥을 박박 닦고 또 닦았다.
애들에겐 그냥 간단한 수술이라고만 했다. 별것 아니니 병원에도 올 필요 없다고 했다. 대학에 다닐 나이인 큰애는 수당이 많다며 위험천만한 높은 철탑에 올랐고, 둘째는 태릉선수촌에서 한창 훈련 중이었다. 애들에게마저 짐이 되긴 싫었다. 수술을 받은 건 2002년 6월 태경이의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던 날이었다. 수술은 길었지만 나는 보란 듯이 일어났다. 그래야 했다. 뒤늦게 달려온 두 아들을 위해서라도, 힘들게 살아온 내 삶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그랬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 두 번째 찾아온 병마, 2002∼2008년
죽을병에 걸렸었다고 집에서 놀 생각은 없었다. 3주를 쉬고 다시 시장에 나왔다. 가족의 만류도 내 고집을 꺾진 못했다. 나를 잘 알아서였다. 집에 있으면 오히려 더 아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이해해서였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시장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하루라도 벌면 그게 얼만데 싶었다.
아침저녁으로 창고에서 물건을 뺄 때나 넣을 때는 애들이 번갈아 도와주니 딱히 힘쓸 일도 없었다. 시장에선 신참 격인 내게 보여준 이웃 상인들의 따뜻함도 큰 힘이 됐다. 그렇게 난, 그리고 우리 가족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남편은 작은 유리가게를 하나 냈고, 잡곡가게도 제법 단골이 생겨났다. 가족은 사글세 방을 벗어나 전세로 옮겼고, 2005년쯤엔가 작은 집도 하나 장만했다. 남편이 사기를 당해 나락으로 떨어진 지 10여 년 만이었다. 전국체육대회에서 해마다 금메달을 따던 작은아들은 수원시청 팀에 들어가 공무원 월급을 꼬박꼬박 집으로 가져왔다. 2007년 초에는 큰애 혼사도 치렀다. 모두가 힘든 시절을 이겨낸 보상이려니 했다.
시련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두 번째 암도 그랬다. 늦여름 더위가 유난히 길어져 그런 줄만 알았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갑상샘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암이란 게 이리도 흔한 병이던가. 그나마 첫 수술 후 받아오던 정기검진 덕에 암 덩어리를 일찍 발견할 수 있었다나. 억울했다. 한 번은 견뎌냈지만 두 번째는 정말이지 자신이 없었다. 또다시 팔자 타령을 하기에는 너무 지쳤다. 다 내려놓고 싶었다.
○ 두 번째 수술 후 깨어난 날, 2008년 가을
엄마, 엄마 하는 소리에 어렴풋이 눈을 떴다. 눈꺼풀이 한없이 무거웠지만 내가 산 건지, 죽은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수척해진 애들 얼굴과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눈을 감았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가만히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족들은 그대로 있었다. 살았구나. 그래 살았어.
○ 다시 얻은 인생, 2008∼2011년
수술에 들어가기 전부터 새아가의 몸이 좋지 않았다. 제 몸이 아픈데도 시어미 병 수발까지 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시련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처럼 행복도 예고를 하지 않았다. 병실로 뛰어 들어온 며느리는 대뜸 내년에 손주를 안겨드리겠다고 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던 인생이었는데. 이겨낸 보람이 있었다. 며느리가, 아니 내 ‘딸’이 그렇게도 바라던 소원마저 풀어주지 않았나.
그 덕이었을까. 놀랄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수술 후유증 탓에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퇴원한 지 한 달 만에 시장에도 다시 나왔다.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말리는 가족들도 그 말을 내가 들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다리가 아프면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면 됐고, 그마저도 힘들면 일찍 장사를 접고 들어오면 그만이었다. 지난해에는 전국체육대회가 열린 진주에도 다녀왔다. 태경이가 금메달을 따는 모습도 보고, 바깥 구경도 실컷 했다. 결혼 후 처음 간 여행이었다.
오늘도 오전 10시에 창고에서 봉지봉지 쌓아둔 잡곡을 꺼내와 하루를 시작했다. 여름에는 시원한 냉커피와 식혜를 팔고, 날씨가 추워진 뒤엔 따뜻한 커피를 끓여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우리 가게에서 사간 잡곡으로 맛있게 밥을 지어 먹었다는 얘기도 듣고, 수표밖에 없다는 아주머니에게 돈은 나중에 가져다 달라며 찰흑미를 들려 보낸다. 가끔은 7000원짜리 혼합곡을 2000원어치만 사가겠다는 손님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한다. 결국 지는 건 항상 나지만.
하루에 1만 원을 팔아도, 2만 원을 팔아도 나는 시장에서 인생을 산다. 이제는 빈 쌀독과 밀린 집세를 걱정하지 않지만, 앞으로도 난 이곳 못골시장 입구의 작은 잡곡가게를 떠나지 않을 거다.
수원=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 성은숙 씨 취재 다이어리 성 씨 같은 극적인 사연 시장이야기 전합니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 지동의 못골시장에는 90개 안팎의 점포가 오밀조밀 모여 있습니다. 아주 작은 골목시장이죠. 이야기의 주인공 성은숙 씨(58)는 ‘2001 아울렛’ 맞은편 시장 입구의 금은방 앞에서 12년째 잡곡을 팔고 있습니다. 한 평(3.3m²) 남짓한 공간에 작은 선반을 놓고 10여 가지 잡곡을 진열해두고 장사를 합니다. 가게라기보다는 노점에 가깝죠. ‘은하잡곡’이라는 가게 간판은 유심히 보지 않으면 찾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성 씨에겐 자신의 인생이 담긴 곳입니다. 꽤 오랫동안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줬던 곳이니까요.
대전에서 살았던 성 씨 가족은 남편 이서규 씨(62)가 하던 버스사업이 어려워진 뒤 수원으로 이사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이어진 성 씨의 인생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렸고, 2002년과 2008년엔 각각 자궁경부암과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성 씨는 이 모든 걸 보란 듯이 이겨냈습니다. 못골시장에서 성 씨를 만난 건 지난달 하순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작아 시끄러운 시장에선 잘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갑상샘 수술 때문이거나 수술 후 크게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해서일 겁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꼿꼿이 서서 열심히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 내내 두 아들에 대한 지극함을 드러내서였을까요. 굴곡진 인생을 담담히 털어놓는 그에게 저도 모르게 ‘어머니’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네 전통 시장에는 참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성 씨와 같은 시장 상인들의 이야기도 있고, 예술과 만나 탈바꿈한 재미난 시장 스토리도 있습니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는 이런 시장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지면을 통해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첫 회 주인공이 된 성 씨와 그의 가족 앞에 펼쳐질 인생이 더욱 빛나길 기대해 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