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기 돈 들여 창업하면 ‘바보’라는 소리 들어요. 말 잘 하고 사업계획서 잘 쓰면 누구나 청년 창업자금을 타낼 수 있으니까요.”
20일 만난 인터넷 벤처기업 대표 김정열(가명·26)씨는 창업자금 브로커로 활동했던 경험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 씨는 지난해까지 청년 창업자금을 처음 신청하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고 사업계획서를 대신 써주거나 면접요령을 알려주는 일을 했다. 과거 몇 차례 창업자금을 타내면서 쌓은 노하우를 십분 활용한 것이다.
심각한 청년실업 문제의 대안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20, 30대 청년 창업자를 대상으로 각종 정책자금을 쏟아내자 편법으로 이를 타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심지어 창업할 뜻이 없는데도 창업자금을 받아 탕진하는 일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창업자금이 절실한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엉뚱한 ‘꾼’들의 호주머니로 세금이 들어가는 셈이다.
○ “나 같은 사람은 정부가 걸러내야”
김 씨는 브로커를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하면서도 자신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중소기업청의 예비기술창업자금을 두 번이나 타내는 등 정부와 지자체 정책자금으로만 총 3억 원을 모았다. 수법은 간단했다. 같은 사업과제를 마치 다른 것처럼 제목만 바꿔 여러 곳에 신청하거나 지방의 동업자를 통해 동일한 사업계획서를 해당 지자체에 제출해 돈을 타냈다.
김 씨는 “정부나 지자체는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고, 한번 돈을 내주면 사후관리도 하지 않았다”며 “청년 창업자금을 제대로 관리하려면 나 같은 사람부터 걸러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아예 인터넷에 ‘청년창업 컨설팅’ 사이트를 열고 장사하는 브로커도 적지 않다. 실제로 네이버의 한 청년창업 컨설팅 카페에는 “5만 원(부가세 별도)을 입금하면 사업계획서를 보완, 수정해주겠다. 합격하지 못하면 100% 환불해준다”는 글이 올라와 있다. 본보 취재결과 이 사이트는 최근 대학을 졸업하고 청년 창업자금을 타낸 이성현(가명·26) 씨가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이 씨는 이 사이트에 “지난해 총 51명으로부터 사업계획서를 접수해 49명을 합격시켰다”며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는 이 씨의 도움을 받은 지원자들의 후기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한 지원자는 “포기하려 했는데 컨설팅을 받고 운 좋게 최종 합격했다”며 “2차 면접 대비 질문 리스트까지 받아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 면접 강화하고 사후관리 뒤따라야
올해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청년창업 전용 지원사업’은 14개로, 관련 예산은 총 1120억 원에 이른다. 중소기업청이 창업선도대학 육성 등 8개 사업에 770억 원, 고용노동부가 청년 창직 및 창업 인턴사업 등에 111억 원을 지원했다. 지자체도 서울시가 ‘청년창업 1000 프로젝트’ 등에 200억 원, 대전시가 ‘대학창업 300 프로젝트’에 20억 원, 경기도가 ‘G창업 프로젝트’에 19억 원을 내놨다. 이 밖에도 정부와 지자체들이 창업교육과 대학 창업 강좌, 창업동아리 지원에도 앞 다퉈 돈을 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청년 창업자금이 늘면서 편법 신청이 기승을 부리자 지원기관들은 이를 걸러내기 위한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매달 최대 100만 원씩 총 1200만 원의 현금을 주고 사무실도 무상으로 내주는 ‘청년창업 1000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서울시 강남청년창업센터는 ‘중간 퇴출제’를 도입했다. △매달 4시간 이상 창업교육 의무 수강 △주당 15시간 이상 사무실 출근 △월 2회 창업활동보고서 제출 등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중간에 지원을 끊는다. 특히 돈을 타내기 위해 명의만 빌려준 사람이 교육에 대리 출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창업센터 정문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고, 바코드가 달린 출입카드로 출석까지 체크하고 있다. 이 제도를 도입한 뒤 강남청년창업센터에서만 올해 500명의 최종 선발자 중 12명이 퇴출됐다.
전문가들은 청년 창업자금이 새는 것을 막으려면 돈만 쥐여 주지 말고 이처럼 컨설팅과 사무공간을 제공하는 등 사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면접심사를 강화해 창업 의지가 낮은 지원자들을 철저히 걸러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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