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의 의료장비로 과잉진료를 한다, 의사들은 환자 수 실적 올리기를 강요당하고 제약회사가 리베이트를 제공하는 약만 사용한다….
현직 의사 출신 감독이 의료계의 비리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하얀 정글’을 만들어 다음 달 1일 개봉할 예정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이 영화의 송윤희 감독(32·여·사진)은 산업의학과 전문의로 의료연구 단체인 ‘건강과 대안’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영화는 의사, 간호사, 병원 원무과 직원들을 인터뷰하고 외국과 의료체계를 비교하며 한국 의료 현실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2008년 미국 의료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에 비견된다.
‘하얀 정글’은 먼저 병원들의 과대광고를 꼬집는다. 2007년 의료광고 규제가 풀리면서 병의원들은 광고비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지하철역 벽면 광고비가 한 달에 최소 150만 원이고, 성형외과들은 월평균 3000만∼4000만 원의 광고비를 쓰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광고비 지출은 환자 부담으로 떠넘겨진다. 병원은 불필요한 자기공명영상(MRI)이나 컴퓨터단층촬영(CT) 등 고가의 검사를 환자들에게 강요한다. 영화에 출연한 한 대형병원 원무과 직원은 “예전보다 고가의 검사가 많아졌다. 환자 수는 비슷한데 3∼4년 사이에 응급실 수입은 크게 늘었다. CT를 하루 150∼170번 찍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 직원은 병원이 고급병실만 늘려 놓아 맹장염 수술을 하고도 일반병실이 없어 하루 병실료가 80만 원인 특실에서 묵는 일도 있다고 전했다.
한 대형병원 의사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여주며 “원무과에서 매일 외래환자 수를 통보하며 실적을 올리도록 쫀다(채근한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의사는 “제약회사가 스폰서(후원)하는 약을 처방하도록 강요받았다”고 전했다.
영화에는 국소마취로 충분한 백내장 수술에 전신마취를 강권받은 송 감독의 할머니 사례와 한 대학병원의 교수회의 때 등장한 ‘교수별 수입 순위’ 문서도 나온다.
병원들이 돈벌이에 목매는 동안 환자들은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제작진은 한 대학병원 유명 의사의 진료실을 취재했는데, 환자 1인당 평균 진료시간은 31초에 불과했다. 이 의사는 하루 300∼40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영화는 정부가 의료를 시장 논리를 따라야 하는 민간에 맡기면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공공의료시설은 소수에 불과하고 그나마 질이 낮아 환자들이 외면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민간의료 공급률은 90%로 병원 10곳 중 9곳은 민간이 운영하고 있다.
영화에는 돈이 없어 진료를 포기한 환자들의 사례가 나온다. 한국의 공공의료 부담률(국가가 환자의 진료비를 내는 비율)은 55%에 불과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멕시코, 미국에 이어 꼴찌에서 세 번째라는 2007년 통계도 보여준다.
송 감독은 17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많은 언론이 다룬 문제들이기는 하지만 대중이 어려운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영화로 제작했다”며 “의료가 산업이기 전에 복지의 문제라는 점을 꼭 말하고 싶었다. 그래야 무한 의료 경쟁의 ‘하얀 정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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