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새의 눈빛만으로… 대사없는 스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24일 03시 00분


명동예술극장에서 재공연 중인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새’를 연기하는 이기돈 씨. 대사 없는연기에 강했던 그는 “이제 막 말을 시작했을 뿐이다.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국립극단 제공
명동예술극장에서 재공연 중인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새’를 연기하는 이기돈 씨. 대사 없는연기에 강했던 그는 “이제 막 말을 시작했을 뿐이다.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국립극단 제공
“에이, 저 동물 전문 배우 아니에요. 동물로 나온 건 몇 번 안돼요.”

올 초 국립극단 창단 공연으로 초연한 뒤 이달 27일까지 재공연 중인 연극 ‘오이디푸스’(한태숙 연출)에서 오이디푸스의 불길한 운명을 예고하는 새(鳥)로 출연하는 배우 이기돈 씨(32·사진). 그는 17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기자의 ‘동물 전문 배우’라는 표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서 같이 한번 따져봤다. 2006년 ‘이아고와 오셀로’에서 검정개로 연극 데뷔, 2007년 ‘네바다로 간다’에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그해 ‘짐’에서 물에 빠져 죽은 귀신, 2009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 흰 구렁이, 2010년 ‘오장군의 발톱’에서 살인자 겸 개, 그해 ‘악령’에서 악마, 올해 ‘오이디푸스’에서 새, ‘주인이 오셨다’에서 연쇄살인범.

‘악령’과 ‘주인이 오셨다’를 빼면 동물 역이 아니더라도 거의 대사가 없는 배역이었다. 그런 그가 요즘 공연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몸 연기, 눈빛 연기가 좋은 ‘존재감 있는’ 배우란 평판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에서 그의 연기는 무대 높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 짐승의 울음을 토해내고 날갯짓하는 게 다지만 커튼콜 때 가장 많은 박수를 받는다.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했던 그의 삶은 2006년 한태숙 연출의 ‘이아고와 오셀로’에서 우연히 검정개로 출연하면서 달라졌다. 대학 때 연극과 학생들과 어울려 몸 풀기 운동을 즐겼던 그를 ‘몸 쓰기의 달인’으로 눈여겨본 한 후배가 한태숙 연출에게 그를 추천했다.

“흠씬 두드려 맞고 물에 빠져서도 계속 맞다가 죽는 역할이었어요. 스펀지로 맞았는데 물에 젖으니까 너무 아프더라고요. 온몸에 멍이 들었죠.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그는 개를 연기하기 위해 한 바퀴 2.5km인 석촌호수 산책로를 네 발로 매일 한 바퀴씩 2주를 뛰었다고 했다. 이후 한태숙 연출은 작품 때마다 그를 불러 대사 없는 역할을 맡겼다.

“2009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선 원래 대사가 열 줄 정도 됐어요. 그런데 잘 못하니까 나중엔 다섯줄로 줄이시더라고요.”

이 작품은 그에게 배우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원래 연극 화법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함께 출연한 박정자 선생님 화법을 보곤 생각이 달라졌죠.”

지난해 지명 오디션을 거쳐 나진환 연출의 ‘악령’에 출연한 데 이어 올해 김광보 연출의 ‘주인이 오셨다’에서 주역인 연쇄살인범 ‘자루’로 열연하면서 ‘말도 되는 배우’라는 인식을 굳혔다. “‘주인이 오셨다’가 끝나고 대여섯 군데에서 출연 요청 연락을 받았어요. 영화 쪽도 있었고, 매니저를 맡고 싶다는 전화도 받았죠.”

1시간 40분가량의 ‘오이디푸스’ 공연 시간 중 그의 출연시간은 30분 정도. 그러나 팬티만 입고 몸 전체를 보디페인팅으로 분장하는 데 최대 1시간 반, 지우는 데도 30분 넘게 걸린다. 게다가 철봉 위에서 맨발로 최대 15분 정도 쭈그려 앉아 있어 공연 중 근육 경련으로 고생하는 일도 잦다.

그래도 그는 이 작품 출연을 위해 다른 일은 다 제친 의리파다. “한 선생님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대사 못 줘 미안하다, 너한테 대사 안 준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고.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이셨어요. ‘다음에는 거미 한 번 해볼래?’”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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