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까지 맞벌이를 하며 자녀 3명을 키우던 김모 씨(47·서울 도봉구 방학동)는 올 1월 부인이 담도암으로 입원한 뒤부터 병원비에 쪼들렸다.
월평균 진료비는 745만 원. 본인 부담금은 이 중 110만 원이었다. 그러나 항암치료를 시작하자 간병비로 매일 4만 원이 더 나갔다. 2월까지는 민간보험에서 나오는 돈으로 병원비를 막았다. 하지만 3월부터는 300만 원 남짓한 소득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이 씨는 결국 구청에 기초생활보호대상자 신청서를 내고 긴급의료 지원을 요청했다. 김 씨처럼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긴급 의료비를 요청하는 가구가 다시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2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 1월부터 7월까지 긴급 의료비 신청자 중에서 차상위계층 이상 시민은 42.7%(8372명)였다. 지난해 29.5%에서 13.2%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재난적 의료비에 휘청=세계보건기구(WHO)는 가구의 가처분 소득에서 보건의료지출이 40%를 넘을 때 ‘재난적 의료비’라고 부른다. 가처분 소득은 벌어들인 소득 중 소비나 저축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며 보건의료지출은 주로 병의원에 내는 돈이다. 한국에서 재난적 의료비를 지출하는 인구 비율은 2007년 2.7%로 조사됐으며 이후엔 공식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의료비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국가가 의료비 전액과 생계비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상위계층은 의료비를 모두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바로 이들이 재난적 의료비 지출로 타격을 심하게 받는다고 복지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광주 북구에서 시가 7억 원짜리 모텔을 운영하던 장모 씨(50)는 지난해 뇌종양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입원한 지 보름 만에 나온 총 진료비는 1610만 원. 본인부담금은 732만 원이었다. 입원 초기에는 모텔에서 나오는 수입금과 민간보험금으로 본인부담금을 냈지만 다섯 달을 버티지 못했다.
그가 사업에서 손을 떼자 모텔은 쌓인 부채 때문에 경매에 넘겨졌다. 장씨는 올해 1월부터 기초생활수급자가 됐지만 금융재산 조회 결과 민간보험금을 탄 사실이 발견돼 의료지원금과 생계비, 교육비가 끊겼다. 그 후 장 씨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큰아들은 연락을 끊고 집을 나갔다. 장 씨는 중학생인 작은아들과 부인을 광주 시내에 남겨둔 채 충남의 한 농촌 마을로 떠났다.
복지부 관계자는 “장 씨보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구들은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중증질환에 걸리면 3개월 이내에 기초생활수급자로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커지는 의료 사각지대=재난적 의료비 지출 때문에 긴급 의료지원을 요청하는 차상위계층 이상 인구는 2009년까지 증가세였다가 지난해 그 비율이 줄었다. 하지만 올 상반기부터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 국내 굴지의 공기업에서 명예퇴직한 박모 씨(56·전북 무주군)는 같은 해 5월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뒤 지금까지 6400만 원을 본인부담금으로 냈다. 그가 내는 본인부담금은 매달 400여만 원. 그의 부인 김모 씨는 “퇴직금과 국민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퇴직금 대부분이 병원비로 나가는 바람에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신영석 사회보험연구실장은 “최근 급속한 소득 양극화로 중산층에서 저소득층으로 떨어지는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며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의 본인부담금이 과중한 데 대한 지원대책이 없어 의료 사각지대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장기 중증질환자의 경우 간병비와 선택진료비 등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진료비에 대한 부담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신 실장은 “긴급의료구호기구가 최근 출범하고 민간 기부가 늘고 있긴 하지만 차상위계층 이상에 대한 복지 자원 배분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 재난적 의료비 지출(catastrophic health expenditure) ::
세계보건기구가 규정한 용어로 가구의 가처분 소득에서 의료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초과한 경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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