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실이 경찰의 내사를 검찰이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발표하자 전체 수사경과(警科) 경찰관의 10% 이상이 경과를 집단적으로 반납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정치권은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 경찰 측에 힘을 실어주며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경찰청 수사구조개혁단은 “24일 낮 12시까지 수사경과 경찰관 2만2000여 명 중 2747명(12.5%)이 수사경과 해제 희망원을 제출했다”며 “정확히 집계는 하지 못했지만 오후에도 이런 상황이 줄기차게 이어졌다”고 밝혔다. 줄잡아 5000명 안팎의 경찰관이 수사경과 해제 희망원을 제출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경과란 군으로 치면 병과(兵科)로 수사경과란 범죄조사를 전문으로 하는 경찰관의 직무 종류다. 수사경과를 반납한다는 것은 검찰의 지휘를 받는 수사활동 대신 교통 경무 생활안전 등의 업무를 맡겠다는 것이다. 경정 이하의 경찰관은 직무에 따라 수사 일반 보안 통신 등의 경과가 있다.
이날 오후에는 서울 동대문경찰서 형사과 소속 경찰 80여 명이 집단으로 수사경과를 반납하기로 하고 희망원을 제출했다. 한 경찰관은 “치안감 이상 경찰간부가 총사퇴를 해서라도 조정안 통과를 막고 경찰의 분노를 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번 조정안은) 경찰의 비극”이라며 “이런 식이라면 경찰에게도 검찰을 수사할 권한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사경과 반납운동은 경남 진해경찰서 양영진 수사과장(38)이 시작했다. 양 과장은 23일 오후 2시 50분 온라인 경찰 커뮤니티 ‘폴네띠앙’에 ‘수사경찰을 포기합니다’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그는 “그동안 수사경찰로서 검찰의 노예처럼 일하면서도 언젠가는 개선이 되리라 믿었다”며 “형사소송법의 개정 취지를 무시한 총리실의 강제 조정안에 그런 희망이 사라졌다”고 밝혔다. 그는 희망원을 들고 ‘인증샷’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이 글에 많은 경찰이 ‘나도 수사경과를 포기하겠다’고 댓글을 달며 수사경과 포기에 동참했다.
인터넷에서 ‘범죄사냥꾼’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이름을 알린 서울 중부경찰서 이대우 교통조사계장(45)도 동참했다. 이 계장은 서울 서대문서 강력팀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사건을 해결해 언론에 자주 등장한 바 있다. 그는 트위터와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강력범죄수사 카페에 “자유롭게 수사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반납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수사경과를 내놓고 카페 문을 닫겠다”고 밝혔다. 2000년 5월 26일 개설된 이 카페는 현재 3만52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경찰 내부망에도 국무총리실에 대한 성토와 수사경과 반납 선언이 이어졌다. 대부분 ‘검찰의 성역화를 파괴해야 한다’ ‘조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이다.
경찰 일각에서는 총리실이 아니라 국회를 설득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조정안이 근거를 둔 형사소송법 자체를 재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경찰은 경찰 내부망에 “검찰의 우위를 인정한 형소법 자체가 문제”라며 “내년 총선을 앞둔 국회를 압박해 형소법 자체를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이인기 위원장의 홈페이지에도 23일부터 ‘총리실의 조정안을 막아 달라’는 글이 200건 가까이 올라왔다.
이날 경찰청은 “총리실 조정안 가운데 경찰이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미흡한 부분은 개선될 수 있도록 방법을 찾겠다”며 “일선 직원들도 냉철하게 판단해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의견 개진을 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정치권도 정부의 검·경 수사권 조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여야 모두 국무총리실의 조정안이 올 6월 국회에서 개정한 형소법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검찰이 경찰의 내사사건까지 지휘하겠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내사사건은 경찰에 전권을 주는 것이 옳으며 국무총리실의 수사권 조정안은 이 부분에 한해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는 “검찰의 경찰 통제권을 더 강화하겠다는 것인데 일방적으로 검찰 편을 들었다”고 비판했다. 김유정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어렵사리 이뤄진 여야 간 합의를 깡그리 무시한 결정”이라며 철회를 요구했다.
다만 조정안 내용이 담긴 ‘검사의 사법경찰관리에 대한 수사지휘 및 사법경찰관리의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안’은 대통령령이어서 총리실이 정치권의 주장을 수용할지는 불투명하다. 청와대도 “조정안 성격상 검찰과 경찰 어느 쪽도 만족할 수는 없다. 되돌리기는 어렵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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