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여고 2학년 황은혜 양(16·사진)은 잘 웃는다. 발랄하고 활동적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수줍어하지 않고 서글서글하게 말을 잘 건넨다. 새로운 장소에 가는 것도 좋아한다. 대학에 가면 제일 하고 싶은 것 중 하나도 전국여행이다. 그러나 황 양이 항상 그랬던 건 아니다. 2년 전 그는 집 밖에 나가길 싫어하고 사람을 만나기 꺼려했다. 집에만 있는 황 양이 안타까웠던 어머니가 ‘햇볕 좀 쐬러가자’고 외출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2년 사이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3년 전인 중2 5월. 황 양은 인도에 사는 친척의 권유로 인도 유학길에 올랐다.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이었다. 그해 12월까지 인도 뱅갈로의 친척 집에서 머물며 한 국제학교에서 정규수업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새 학기에 맞춰 중학 3학년으로 복귀하려고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인도에서의 수업일수가 부족해 중3으로 바로 복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3개월간 사설 어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했던 게 원인이었다.
1년을 유급해 다시 중학교 2학년 과정에 들어가거나 고입자격검정고시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 앞으로 계속 자신보다 어린 친구들과 같은 교실에서 생활할 자신이 없었던 황 양은 검정고시의 길을 택했다. 집에서 혼자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학교에선 한창 수업이 진행될 시간. 교복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집에 있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울했다. 친구들과 수다 떨던 쉬는 시간이 눈물나게 그리웠다. 원래 알던 친구들과도 학교생활을 공유할 수 없으니 자꾸 만남이 꺼려졌다. 외출을 자연히 피하게 됐다.
“길에서 교복을 입고 다니는 또래들을 보면 엄청 부러웠어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고, 친구들과 교실에서 수다를 떠는 사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된 거죠.”
1년 뒤 황 양은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드디어 학교로 돌아가게 된 것. 고교에 입학한 그는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마주치며 집중했다.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게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푼 마음도 잠시. 아무리 검정고시를 합격했다고는 하지만 1년간의 공백을 메우기란 쉽지 않았다.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가장 심각했던 과목은 수학. 기초가 부족하다보니 수업을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모를 때가 많았다. 수학시간엔 꾸벅꾸벅 졸기가 일쑤. 고1 2학기 중간고사에선 수학과목 등수가 전체 573명 중 약 400등까지 떨어졌다. 고교에 진학할 때의 초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전환점을 맞은 건 고2 학기 초였다. 평소 좋아했던 국사 선생님이 이끄는 교내 ‘다문화 동아리’에 가입했다. 탈북 청소년들과 만나 교류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몽골 청소년과 일대일로 멘토-멘티 관계를 맺는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었다.
황 양은 동아리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탈북 청소년들과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나 서울 인왕산을 같이 등반하고, 남산 걷기행사에도 참여했다. 같이 북한음식을 만들어 먹는가 하면 여름방학 땐 경북 안동시로 2박 3일 역사캠프를, 실미도로 갯벌체험을 떠나기도 했다. 처음엔 탈북 청소년에게 약간 편견을 가졌던 황 양은 어느새 그들과 소소한 일상을 문자로 주고받는 친구가 됐다.
“많은 아픔을 가졌음에도 밝게 지내는 탈북자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불평하지 말고 더욱 감사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아리활동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에 활력이 생겼죠. 하루하루가 정말 즐거워졌어요.”
황 양이 삶을 대하는 자세는 180도 달라졌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학교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든 일에 의욕이 생겼다. 교내대회나 학급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학교축제 땐 무대에 올라가 학급 친구들 40여명과 함께 인도 민속춤을 추기도 했다. 황 양이 직접 친구들에게 가르쳐주고 연습한 춤이었다.
공부에도 불이 붙었다. 취약한 수학을 집중 공략했다. 시험에 앞서 수학익힘책을 4, 5번씩 반복해 풀었다. ‘세 권의 문제집을 푸는 것보다는 한 권을 세 번 보는 게 효율적이다’는 고1 때 국어 선생님의 말대로 실천한 것.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일도 더 이상 없었다.
성과는 곧 나타났다. 고2 2학기 중간고사 때 국어 영어 수학 성적이 크게 오른 것이다. 수학 등수는 전교 86등. 1년 전 400등에서 무려 300등이 넘게 올랐다. 고1 때 내신 3등급이었던 국어와 영어 성적은 모두 1등급으로 뛰었다.
황 양은 정치외교학과에 가고싶다. 인도에 다녀와서 잠시 방황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인도 유학은 ‘우물 밖’의 세상과 마주한 좋은 경험이었다. 당시 각국의 친구들과 만나면서 외교 관련 직종에 관심이 생긴 것.
가끔 공부에 지칠 때면 황 양은 동아리활동을 떠올린다. “이번 기말고사가 끝나면 탈북 청소년들과 함께 활동보고세미나를 열고, 겨울방학 땐 1박 2일 캠프도 갈 예정이에요. 엄청 신나겠죠? 스스로 즐겁게 공부할 동기를 불어넣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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