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할매, 이제 화 푸소 미안했소’ 죽기전 이 말 들어야 할낀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8일 03시 00분


정대협 수요집회 다음주면 1000번째… 부산서 상경 최다 참석 김복동 할머니의 恨

지난달 23일 김복동 할머니가 눈물을 머금은 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겪었던 가슴 시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백내장 수술이 잘못 돼 왼쪽 눈이 보이지 않고 오른쪽 눈마저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다. 할머니는 “한쪽 눈이라도 보일 때 일본 정부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지난달 23일 김복동 할머니가 눈물을 머금은 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겪었던 가슴 시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백내장 수술이 잘못 돼 왼쪽 눈이 보이지 않고 오른쪽 눈마저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다. 할머니는 “한쪽 눈이라도 보일 때 일본 정부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수요집회 참가자들이 팔을 들고 힘차게 구호를 외칠 때 김복동 할머니(87)는 야윈 팔을 겨우 들어 허공에 대고 한 번 힘없이 저었다. “피해를 보상하고 공식 사과하라”는 20년간의 외침과 이에 귀를 닫은 일본 정부에 지친 김 할머니는 언제부턴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이따금 고개 들어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는 가득한 분노를 풀 길 없어 쪼그라진 입술에 힘 한 번 주고 부르르 떨었다.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이었던 지난달 23일. 하루 종일 겨울바람이 몰아쳤지만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어김없이 997차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주최로 1992년 1월 8일부터 이어져 온 집회는 14일이면 1000회가 된다.

김 할머니는 할머니들이 처음 참가한 7회 집회부터 참석해 피해 할머니 중 집회에 가장 많이 나왔다. 소녀였던 할머니는 과거가 힘겨워 숨어 지내다 68세가 됐고 세상에 나와 아우성을 치다 87세가 됐다.

이날 아흔을 앞둔 노인의 야윈 얼굴에서는 긴 싸움에 지친 듯 감정마저 묻어나지 않았다. 원망과 분노 애원 다시 분노를 넘어 이제 모든 걸 체념한 듯한 김 할머니는 담담하게 가슴 시린 70여 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 14세 소녀의 8년 만의 귀향

“어매(엄마), 내 올해로 몇 살이 됐소?” 8년이 지났다 카대. 끌려갈 때 열네 살 묵었었는데 스물두 살이 된 기라. 동무들도 다 시집가고 아무도 없다 카대.

내 일본군한테 끌려다니며 모진 고통 당하면서 몇 해가 지났는지도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어느 날 해방이 됐다고 난리더라꼬. 그래가 내 마지막으로 위안부 생활하던 태국 방콕에서 동기들하고 배 타고 하루 두 끼 죽으로 연명하면서 수개월이 걸리가(걸려서) 고향(경남 양산)에 안 왔나. 도착해 보이 논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지고 추수를 한다꼬…. 한 10월쯤 됐을라나.

집에 갔는데 어매가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대. 어매도 놀라지. 아가 새카맣게 변했는 기라. 그 세월을 수백, 수천 명한테 당하고 또 당했으니 열네 살 먹었던 아가 온당하다 할 수 있나. 이 아가 어매를 몇 년 만에 봤으면 울고불고 해야 될 낀데 묻는 말이 “내 몇 살이고” 이 말이니 어매는 가슴이 덜컹하지. 와 내 나이도 모른 줄 아나? 일본 군인들 상대할 때 일부러 세월을 잊었는 기라.

내 열네 살 때 면에서 사람이 나왔더라꼬. 일본이 전쟁을 하는데 군복 맹글(만들) 사람이 모자란다꼬. 가서 얼쩡거리니까 “니도 갈래” 그라길래 “내는 바느질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우째(어떻게) 갑니꺼” 캤다. 그 사람이 “가서 배우면 되제. 나이 쪼매 더 먹어서 시집갈 때 되면 언제든지 보내줄 테니 걱정 말그라” 카더라. “우리 어매랑 가면 몰라도 안 갈랍니더” 카니 “일본 정부에서 하는 일인데 안 간다 카면 너거 가족 다 못살게 만들 끼다” 카는데 내 어찌나 겁이 나던지 그 길로 따라갔제.

그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으로 끌려다니면서 모진 일 많이 당했제. 처음에는 이래(이렇게) 고통당해도 나이 쪼매 차면 보내준다 약속했으니 곧 고향 간다는 희망이 있었제. 그래 날짜 헤아려 가매 겨우 견뎠는데 끌려댕기는 나라만 바뀌고 안 보내주더라꼬. 내 어데 말이 통하나. “좀 보내주소. 콱 죽을 거 같소” 말해도 일본 놈들은 못 알아듣고 웃기만 허네.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주니 벙어리 신세가 된 기제. 어린 내를 그리 농락했으면 ‘미안하다, 인자(이제) 집에 가그라’ 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그라더라. 그래 2년이 갔다.

그라고 나서는 날짜를 안 헤아리고 살았다. 오늘이 며칠인지, 몇 년인지 아는 것도 포기하고 잊어버렸다. 세월 따지고 살았으면 너무 고통시러워서 속이 터졌을 끼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세월을 우찌 헤아리고 살겠노. 하루하루 버티면서 살아나간 기라. 아침에 날 새면 오늘도 무사히 눈떴구나, 해가 지면 무사히 살았다, 밤에 잠들면 자는 새 죽어버리면 얼마나 좋겠노. 그렇게 잠들고 나면 또 눈이 떠지더라. 그 고초라는 기(게) 입에 다 담을 수 있나. 처음에는 생각도 몬(못)했다. 그래 오래 걸릴 끼라고는.

○ 희망을 걸었다


김복동 할머니(왼쪽에서 두 번째)가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998차 수요집회에 참석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노수복 할머니를 추모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김복동 할머니(왼쪽에서 두 번째)가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998차 수요집회에 참석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노수복 할머니를 추모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수요집회가 1000회가 된다 카대. 내는 여든하고도 일곱이나 안 묵었나. 함께 시위하던 동무들은 다 죽고 겨우 육십 몇 명 남았제. 내 집회 처음 할 때가 예순여덟 아이가. 그때만 해도 꼿꼿하게 서 있을 수도 있고 할매라도 젊은 할매였다. 할매들 그때는 “싸우자, 싸우자” 카면서 힘도 넘쳤다꼬. 서울서는 그해 1월부터 위안부 피해 할매들 도와준다고 여성 단체 회원들 모여 가지고 그 추운데 일주일마다 집회를 한다 카는데 내 우째 가만히 있겠노.

그 길로 새벽에 내 하는 식당 있는 부산서 기차를 탔다 아이가. 그해 봄쯤 됐을 끼다. 벌써 집회를 7번인가 했다는데 새벽에 집에서 ‘몸뻬 바지’ 딱 꺼내 입고 운동화 끈 단단하게 묶고 나오는데 ‘그래 한번 해보자. 할매가 가는데 그놈들도 가만히 있겠나’ 싶었제.

마음 단단하게 묵고 일본대사관 앞에 갔는데 눈물이 ‘확’ 하고 안 터지겠나. 몸이 막 떨리더라꼬. 고래고래 고함만 질렀다. 조목조목 항의를 해야 되는데 악밖에 안 나오더라꼬. 내는 위안부 갔다 온 죄로 40년을 타향서 ‘양산집’ 식당 하나 하면서 숨어 살았다. 하늘 아래 “어매”라 부르는 자식 하나 없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살 수 없게 맹글어 놓고… 족두리 한 번 못 써보게 맹글어 놓고…. 낼로(나를) 좀 보라꼬, 다 늙어서 온 할매 한 번 보라꼬 소리만 질렀다. 다른 도리가 있나. 그라면 이놈들이 나와서 “할매 이제 왔는교. 미안하오” 할 줄 알았다.

그렇게 믿고 갔는데 경찰들이 오더니 할매들을 버스에 강제로 태우지 않겠나. 할매들이 울고불고 해쌌는데도 달랑 들어가지고 시청 광장에 내려놓데. 뭐 어떻겠노. 우리는 또 오면 된다 아이가. 기차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제. 기차 안에서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함 해보자. 계속 나가서 소리치면 ‘미안하게 됐소’ 이 한마디 안 하겠나” 싶더라꼬. 희망이라는 게 있었제. 돈이 탐이 나서 그라는 게 아이다. 인간의 도리로서 잘못한 거 같으면 사죄를 해야 될 거 아이가.

집회 때마다 계속 올라왔다. 한 50번째 됐을 때는 아예 청와대로 갔다. 문 앞에서 드러누워 버렸다. “대통령님요. 해결 좀 해주소. 좀 나와 보소”하고. 또 경찰한테 잽히(잡혀)가지고 시청 광장으로 쫓겨났지. 처음에는 이래 하면 갑자기 해결될 거 같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사과 하고, 보상 하라”고 고함만 안 질렀나. 소리 지르고 잽히 가고 시청광장에 풀어지고 또 내려가고… 그라다 보이 세월이 흐르데.

○ 90세 앞두고 꺾인 희망

몇 번은 집회할 때마다 몇 회짼지 써놓고 헤아렸다. 100번 했으니 우리 말 좀 들어주겠네 하고. 안 들어주더라. 일본대사관에 창문이 이십 몇 개 있거든. 우리가 가면 커튼 다 내리가지고 창문 다 막아뿐다. 내다보지도 않는다. “배상하라. 사죄하라” 목이 터지게 아우성을 쳐도 문 앞에 도둑 잡는 카메라 갖다놓고 숨어가지고 “저 할매들이 오늘은 또 뭐 하는가” 보고만 있다. 내도 인자 나이가 들고 속이 갑갑해서 벙어리처럼 소리도 못 지르고 오늘은 커튼이라도 쪼매 열어놨나 싶어서 대사관 한 번 쳐다보다가 속 썩고 만다. 인자 세월이 마이 지나서 혼자 서 있기도 힘들게 됐는데도 아무도 할매 말을 안 들어주는 기라. 애원하고 항의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기라.

그때부터 200회 300회 이래 안 헤아맀다. 그라면 속이 썩어서 살 수가 없다. 인자는 일주일 지나 눈 뜨면 아 수요일이네. 집회 마치고 집에 오면 수요일이 무사히 갔구나 하면서 한 주, 한 주 버틴다 아이가.

내 8년을 끌려 다니면서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열여섯 살 때부터 술을 마셨다. 외국을 댕기다 보니 위스키하고 고량주 마시가면서 일본 놈들 상대했다. 맨정신으로 버틸 도리가 있나. 일본군 상대하고 나면 담배도 피웠다. 어린 가심(가슴)에 피맺힌 한을 풀 방법이 있었겠나. 지금도 집회 마치고 오면 내 방에 앉아 줄담배를 피운다. 할매가 아무리 말을 해도 커튼 한 번 안 걷는 게 너무 답답해서 수요일마다 담배를 억수로 마이(많이) 피운다.

내 오고 스물두 살 먹은 처녀가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 어매가 “결혼을 해야 안 되겠나” 하더라. 어매는 옷 맹그는 공장 갔다 왔는 줄로만 알더라꼬. 안되겠다 싶어 어매 곁에 가서 얘기를 했지. 그랬더니 어매가 “저승 가서 조상을 어떻게 만나겠노. 자식 이래 만든 죄로 뭐라 말하꼬” 만날 그라드만 내 오고 6년 만에 안 돌아가셨나. 의사가 그라더라꼬. “너거 어매 심장에 화가 가득 들었다”꼬.

1000회가 됐다고 다들 난리구마. 내는 1000회가 되도록 해결이 안 나고 있으니 답답해. 내는 백내장 수술이 잘못돼서 왼쪽 눈은 안 보이고 오른쪽 눈도 사람이 찌그러져 보인다. 눈 쪼매라도 보일 때 대사관 놈들이라도 빼꼼히 내다보고 “할매, 이제 고마 화 푸소. 미안했소” 하는 거 볼 수 있겠나. 처음에는 생각도 몬했다. 이래 오래 걸릴 끼라고는. 끌려다니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아무 사과도 못 듣던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가심이 답답하네. 우리 어매도 이래 답답했겠는가. 이래 화가 많았겠는가.

갑자기 어매가 보고 싶소. 1000회를 넘기면 안 될 낀데 말이오. 더 기다려야 되면 안 될 낀데 말이오. 그리 되면 나도 나이가 들어서 인자 안 될 낀데 말이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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