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나의 NIE]조지형 이화여대 교수·미국법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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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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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는 신문으로 과거 재구성

신문은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 도구다. 역사가인 나는 이 교훈을 뼛속 깊이 경험했고 이 교훈을 여전히 실천한다.

나의 박사학위 논문은 모든 자유의 토대가 되는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는 인신보호영장에 관한 것으로,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 미국의 역사를 다뤘다. 이 시기를 연구하는 데 필수불가결했던 작업은 당시의 신문을 꼼꼼하게 읽는 일이다. 일반 사람들이 현재와 미래를 알기 위해 신문을 읽는다면, 역사가인 나는 과거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 신문을 읽는다.

신문은 가장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대중매체다. 신문은 육하원칙에 입각하여 사건을 전달한다. 이렇게 전달된 사건에 대한 실증적 파악은 사건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 시대와 흐름을 읽기 위한 첫걸음이다. 따라서 역사가들이 사건의 연대기를 구성하는 데 기준이 되는 도구도 신문이다.

19세기까지 신문은 특히 사회 지도자의 의견을 일반 국민에게 알리는 거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된 이후, 사회 지도자들은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신문사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물론 대중강연도 있었지만 여러 한계가 있었다.

역시 가장 효과적인 매체는 신문이었다. 신문을 읽은 일반 국민도 서슴지 않고 신문에 투고를 했다. 신문은 지도자와 국민이 만나는 지적(知的) 사고의 광장(廣場)이었다.

공개서한은 때로 실명으로, 때로는 필명으로 신문에 게재됐다. 민감한 정치문제의 경우 주로 필명으로 공개서한이 발표됐다. 어떤 이는 로마의 황제가 되려고 했던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라는 필명으로 공화정의 대의(大義)를 주장하는 일련의 글을 기고했다.

필명 때문에 때로 유쾌한 일도 벌어졌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중년 부인인 체하며 ‘사일런스 도굿’이란 필명으로 글을 기고하자, 도굿 부인이 미망인이라고 들은 남성들이 청혼하려고 난리법석을 벌였다. 물론 이 일로 프랭클린은 신문사에서 도망쳐야 했다.

신문의 공개서한은 토론을 넘어 논쟁을 부르기도 했다. 중요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신문에서는 어김없이 지상 논쟁이 벌어졌다.

필명의 정체를 대강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하고 논쟁을 벌였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필명으로 여러 사람이 동일한 논조의 글을 연속으로 기고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과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그리고 미국 초대 연방대법원장 존 제이는 11개월 동안 제헌회의가 제안한 연방헌법의 비준을 촉구하며 신문에서 논쟁을 벌였다.

신문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신문은 주권자의 전체 의사가 만들어지는 광장이자, 어수선하게 보이지만 다양한 의견이 교환되고 논쟁이 벌어지는 마당이다. 그래서 신문의 건강은 국민과 국가의 건강을 담보한다. 신문을 읽을 때마다 겸허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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