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신당동 떡볶이의 ‘진짜 원조’ 마복림 할머니가 1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인은 1996년 TV 광고에서 “우리 떡볶이 고추장 맛의 비결은 며느리도 모른다”는 대사로 유명해졌다. 수년 전부터 노환으로 가게에 나오지 못하던 고인은 3년 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15일 국립중앙의료원을 출발한 운구차는 고인의 일생이 담긴 신당동 떡볶이 골목을 한 바퀴 돌고 장지인 강원 춘천시 경춘공원으로 향했다.
광주의 한 중농 집안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난 고인은 19세 때 전남 목포로 시집간 뒤 광복 이후 서울로 올라와 남편과 함께 신당동에서 미군물품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1953년 한 중국집에서 자장면 그릇에 가래떡을 빠뜨렸다가 자장소스 묻은 떡을 맛보고는 곧바로 ‘마복림식 떡볶이’ 가게를 냈다. 당시 연탄불 위에 양철냄비를 올리고 고추장과 춘장(자장의 원재료)을 풀어 떡을 넣어 판 것이 오늘날 신당동 떡볶이의 진짜 원조다.
1970년대 중반 신당동 고인의 집 앞 개천이 복개공사로 큰길이 되면서 유동인구가 늘어 장사도 번창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 가스가 보급되면서 오늘날 신당동 떡볶이의 모습을 갖췄다. 1980년대 초부터 떡볶이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떡볶이 골목이 형성된 것이다.
대표적인 서민 음식인 떡볶이를 팔아 온 고인과 가족은 나눔에도 힘썼다. 신당동 떡볶이 상인회 박두규 회장(48)은 “고인이 늘 넉넉한 인심을 주변에 베풀다 보니 상인회 전체가 소외된 이웃돕기에 힘쓰게 됐다”며 “고인의 아들과 며느리가 봉사활동에 제일 열심이다”고 전했다. 상인회는 한 달에 한 번 떡볶이를 만들어 지역아동센터와 복지관 등에 간식으로 지원하고 홀몸노인과 소년소녀가장 가정에도 찾아가 쌀과 선물을 제공하고 있다.
고인은 생전에 오전 2시면 가게로 출근해 떡볶이 장을 만들고 육수인 연한 멸치국물도 직접 만들었다. 수십 년간 떡볶이를 향한 고인의 노력은 오늘날 커다란 냄비에 어묵과 떡, 라면과 쫄면 사리, 튀김 만두, 달걀 등을 넣고 육수를 부어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양념을 푼 떡볶이를 만들어 냈다. 2명 기준으로 7000원 안팎이면 푸짐한 신당동 떡볶이를 즐길 수 있다.
고인이 경영 2선으로 물러난 뒤에는 고인의 아들과 며느리들이 장사를 계속하고 있다. 신당동 떡볶이 건물 입구에서 건물 2채를 쓰는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집’은 첫째 둘째 셋째 아들과 며느리가, 10m가량 떨어진 곳에 20여 년 전 문을 연 ‘마복림할머니 막내아들네’는 막내인 다섯째 아들 부부가 하고 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12일부터 이 가게들도 문을 닫았다. 가게를 찾았던 박병희 씨(42)는 “살갑진 않아도 떡과 사리를 푸짐하게 담아주는 할머니 손길에 자주 찾았는데 돌아가셨다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할머니 가게 옆에서 30년간 떡볶이를 팔아온 박선규 씨(77)는 “고인은 맛에 대한 고집이 남달랐다”며 “다른 가게가 음악 DJ를 데려와 손님을 모을 때도 한결같이 맛을 지키는 데만 열중했다”고 추억했다.
떡볶이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고인이 살았던 낡은 기와집이 있다. 고인이 생전 “집안을 일으킨 발판이 된 옛 가옥을 허물지 말라”고 당부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다른 사람이 세 들어 살고 있지만 문 앞에는 ‘마복림’이라고 쓰인 나무 명패가 걸려 있고 집안에는 할머니가 쓰던 가구와 가족사진이 남아 있다. 넷째 아들 박동섭 씨는 “옛 맛을 지키려 했던 어머니의 뜻이 담긴 집”이라고 설명했다.
고인의 고추장 맛의 비결은 며느리들이 이어 나간다. 마 할머니 떡볶이집 간판에는 ‘며느리도 몰라’ 문구 옆에 ‘이제 며느리도 알아요’라고 적혀 있다. 삼우제가 끝난 다음 날인 18일 가게는 다시 문을 연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