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출근하니 사장이 돈 될만한 물건 모조리 챙겨…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7일 03시 00분


“우리 설은 부도 당했다”… 인천 H목재회사 사장 고의부도
설 앞둔 직원-거래업체 허망

“영세 거래업체들 풍비박산” 16일 인천 서구 가좌동 H사에서 어음 피해를 당한 한 거래업체 관계자가 채권자들이 유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H사 소유공장을 가리키고 있다. 인천=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영세 거래업체들 풍비박산” 16일 인천 서구 가좌동 H사에서 어음 피해를 당한 한 거래업체 관계자가 채권자들이 유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H사 소유공장을 가리키고 있다. 인천=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직원들 월급은 몇 달째 밀려 있는데 사장이 부도낸 뒤 돈 될 만한 물건을 모두 챙겨 잠적했어요. 설날이 내일모레인데 눈앞이 캄캄합니다.”

13일 오후 인천 서구 가좌동의 목재회사인 H사 사무실에 들어서자 뿌연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이 회사를 설립할 때부터 10여 년 동안 근무한 공장장(50) 등 직원 10여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지만 모두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새해 첫 출근일인 2일 이 회사 사장 김모 씨(51)는 고의로 부도를 낸 뒤 휴대전화를 끄고 자취를 감춰 버렸다. 회사 운영비를 지출하기 위해 시재금(時在金) 1000여만 원이 들어 있던 금고에는 1000원짜리 40장만 남아 있었다. 회사 자금 현황이 기재된 각종 서류와 경리팀 컴퓨터도 사라졌다. 심지어 사장은 공장에서 원목을 실어 나르던 지게차 1대도 지난해 12월 30일 처분해 버렸다. 이 회사는 지난해 12월 말 만기가 도래한 어음 4억여 원을 결제하지 못해 2일 1차 부도 처리된 뒤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액만 100억 원이 넘는다. 직원 A 씨는 “회사가 어렵다고 해도 사장을 믿고 버텨 왔는데 어떻게 이런 짓을 벌였는지 분이 가시지 않는다”고 했다.

사장 김 씨가 1999년 설립한 이 회사는 아파트용 문틀과 창호 등을 만들어 건설회사에 납품해 2010년 연매출이 110억 원이 넘을 정도의 중견회사로 성장했다. 김 씨는 다른 목재회사를 운영하다가 부도를 낸 적이 있어 친척인 강모 씨(54)를 대표이사로 올리고 회사를 운영했지만 50억 원 상당의 공장 용지까지 매입해 규모를 키웠고 직원 월급도 꼬박꼬박 지급했다.

그러다 2년 전부터 건설경기 침체로 불황에 빠지면서 공장을 담보로 빌린 은행대출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경영난을 겪기 시작했다. 급기야 지난해 8월에는 보증금 1억5000만 원에 월 임대료 3000만 원을 주기로 하고 인근 용지를 빌려 공장을 옮겼다. 이때부터 직원 30명의 월급도 밀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추석을 전후로 일부 직원이 임금체불에 항의하자 김 씨는 “공장을 매각해 대출금을 갚고, 나머지 돈으로 12월까지 밀린 월급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김 씨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사라졌다.

이 회사에 그동안 원자재를 납품해 온 50여 개 거래업체의 사정도 딱하다. 김 씨는 공장을 옮긴 뒤 결제대금으로 모두 5, 6개월짜리 어음을 남발했다. 피해액이 모두 50억 원이 넘는다는 것이 이들 업체의 설명이다. 이 회사가 문틀과 창호를 납품하는 일부 기업체에서도 기성금(공사나 제품을 납품한 만큼 받는 돈)을 미리 받아 챙겼다는 것이다.

김 씨의 파렴치한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직원들과 거래업체에 따르면 그는 회사 경영이 어려운데도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녔으며 법인카드로 골프장과 술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11월에는 공장에서 원목을 자를 때 나오는 톱밥을 수거하는 업체에 “직원들을 위해 집진기를 설치해야 한다”며 500만 원을 받아 가로채는가 하면 부도를 내기 전 법인 명의로 고급 승용차를 구입한 뒤 이를 되팔아 도주자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재 김 씨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다. 부인과 살던 아파트는 오래전 처분해 자신의 명의로 보유한 재산은 한 푼도 없다. 그러면서도 두 자녀를 수년 전부터 미국 뉴욕에 유학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 B 씨는 “요즘 건설경기 침체 여파로 인천의 가구회사와 목재회사가 연쇄 도산해 이직할 자리도 없다”며 “퇴직금도 못 받았는데 가족들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김 씨에게 10억여 원을 떼인 거래업체 관계자는 “직원들도 문제지만 영세 거래업체도 모두 풍비박산이 나게 생겼다”며 “김 씨를 사기와 횡령 등의 혐의로 고소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인천=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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