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당신은 고흐의 구두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어두운, 환한 빛을 뒤로한 가죽구두 한 켤레. 어느 날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다짐했다. 봄에 딸기를 먹는 일도 인생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건 일 년 가운데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고 지금은 가야 할 길이 멀다.”
1935년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한 강의에서 예술의 본질이 ‘진리의 비은폐성’에 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도구에 대한 예로 고흐의 구두 그림을 소개하게 된다. 1950년 강의 원고를 정리한 글이 바로 ‘예술작품의 근원’이다.
‘반 고흐의 잘 알려진 유화 한 폭을 택하기로 하겠다. …밭일을 하는 농촌의 아낙네는 신발…신발이라는 이 도구의 수수하고도 질긴 무게 속에는 거친 바람이 부는 드넓게 펼쳐진 밭고랑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는 강인함이 배어 있고, 신발가죽 위에는 기름진 땅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으며, 신발 바닥으로는 저물어가는 들길의 고독함이 밀려온다. …즉 한 켤레의 농촌 아낙네의 신발이 진실로 무엇으로 존재하는지를 밝혀주고 있다.’(‘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지금 속삭이는 건 당신의 음성. 아, 하이데거는 그림 속 구두의 주인을 농촌 아낙네로 보았군요. 그림 속의 세계는 고요한 듯 보였다. 이 고요를 깨뜨린 인물은 메이어 샤피로라는 미술사학자. 그는 1965년 한 통의 편지를 쓴다. 수신인은 하이데거, 고흐의 여러 구두 그림 중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소개된 작품의 정확한 제목을 묻는 내용이었다. 하이데거는 1930년 암스테르담 전시에서 본 작품이라고 대답한다. 그 전시도록을 손에 넣은 샤피로는 해당 그림의 제목이 ‘낡은 구두’임을 밝혀낸다. 그 후 자료들을 수집하는데, 목적은 하이데거의 주장에 반론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낡은 구두’의 주인은 농촌 아낙네가 아니라 화가, 즉 고흐라는 새로운 주장.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신은 예쁘다. 샤피로의 주장에 따른 근거 두 가지. 하나는 ‘낡은 구두’에 적힌 1886년이라는 제작연도인데, 벨기에를 떠난 고흐는 1886년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그때 그린 ‘낡은 구두’에는 가죽구두 한 켤레만 그려져 있다는 것. 파리의 뒷골목을 배회하던 고흐 자신이 투영돼 있다는 해석이다. 반면 벨기에 시절 구두 그림에는 당시 농부들이 신던 나막신이 정물과 함께 묘사돼 있다. 또 하나는 고갱의 산문인데 1888년 프랑스 고흐의 화실에 머무르던 고갱은 낡은 구두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고흐는 고갱에게 목사를 꿈꾸던 벨기에 시절, 이 구두가 그때의 피로를 잘 견뎌주었다고 말한다. 이 내용을 1968년 ‘개인의 사물로서의 정물―하이데거와 반 고흐에 관한 소고’라는 글로 정리한 샤피로. 그는 ‘낡은 구두’에는 고흐의 고단한 삶이 담겨 있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고흐의 구두 이야기는 끝났는가. 아니다. 1978년 해체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상환’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그는 고흐의 ‘낡은 구두’ 논쟁을 소개하면서 우리는 진리가 제거된 그림을, 더 이상 그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되는 그림을 꿈꾼다고 말한다. ‘낡은 구두’의 주인을 찾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의미일까. 당신, 꽃잎의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고흐를 다시 만난다.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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