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음식점 배달원인 A 씨(50)는 그날도 인근 2㎞ 떨어진 아파트에 음식배달을 하던 중이었다. 지하철공사장 앞에 도달하자 건설 인부들이 손짓으로 출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는 늘 다니던 길이기 때문에 달렸다. 갑자기 땅이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하 27m의 웅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앞에 그의 아내와 세 자녀, 장모가 어른거렸다.
그가 배달을 시작한지는 1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30대에 촉망 받는 대기업 사원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평소 익히 눈 여겨 봤던 유통업분야에서 창업을 하고 싶었다. 과감히 평범한 직장인에서 CEO로 변신했다. 초기엔 어려웠지만 예상은 적중했다. 집이 3채가 생길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하지만 시샘이라도 하듯 암초를 만났다. 사람을 믿은 것이 죄였다. 사기를 당해 집은 경매처분 되고 그도 신용불량자가 됐다. 살아야했다. 아들 둘을 중학생 때부터 중국유학을 보냈던 그는 중도에 아들들에게 돌아오라 할 순 없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나야 했다. 그러나 신용불량자가 사는 방법은 허드렛일 뿐 이었다.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인천을 전전하다가 보증금 1000만 원짜리 빌라를 월세로 얻었다. 인천 서구 마전동 외진 도로 옆이다. 우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음식점을 두드렸다. 식사제공에 월 220만 원. 일단 버틸 수 있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해 12시간 일했지만 흥이 났다. 오랜만에 힘도 솟아났다. 나이 50에 일을 할 수 있는 것만도 행복했다. 유통업 사장이던 그는 계산이 빨랐고 배달도 누구 못지않게 정확했다. 지각 한번 안했다. 음식점 주인은 그에게 가게를 맡기고 개인 일을 볼 만큼 신뢰했다. 주말이면 꼭 아내, 장모와 저녁식사를 했다. 음식점 회식자리도 피하고 집에 일찍 들어갔다. 방학을 맞아 중국에 있는 아들들이 오면 그는 늘 싱글벙글했다. 자신도 틈틈이 공부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사고가 난 18일에도 여느 때처럼 음식점사장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배달에 나섰다. 오후 3시에 나간 그가 1시간여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음식주문을 했던 아파트 주민의 확인 전화벨이 음식점에 울렸다. 사장은 사고가 났다고 직감하고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혹시…".
전화를 받은 인천 서구 검단지구대 경찰은 "인천지하철 2호선 201공구 앞 도로가 지름 12~14m 타원형에 27m깊이로 붕괴했는데 오토바이 배달원이 빠졌다"고 말했다. 공사관계자가 안전펜스를 설치하지 않고 수신호만으로 출입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정차해 있던 버스운전자(1번·서구 왕길동~부평구 부평역)는 오토바이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달려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사고가 났는데도 특별한 통행금지용 바리게이트나 펜스가 설치되어있지 않았고 일부 시민이 도보로 통행하기도 했다. 사고현장에서 30m가량 떨어진 부동산중개소 사장은 "붕괴 조짐도 없었고 별안간 무너졌다. 놀라서 밖으로 나가 보니 오토바이 운전자가 빠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공사장에는 지반이 붕괴가 되면 지켜야 할 안전매뉴얼이 없었다. 규정된 것은 없어도 통상적으로 2차적인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바리게이트를 2, 3중으로 설치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하지만 이곳은 왕복 3차선 차도는 바리게이트로 통제했지만 양쪽 도보는 오토바이나 행인들이 통과하기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인천지하철 2호선은 당초 2단계로 나눠 2018년 완공될 예정이었지만,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이전에 개통한다는 목표로 완공시기를 2014년 8월로 앞당겼다. 이를 위해 전체 구간을 16개 공구로 나눠 동시에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경찰은 23일 중간수사 발표를 통해 공사관계자가 "사고발생 1주일 전부터 토사가 떨어졌고 3일 전부터는 누수 양도 많아져 당일 보강공사 중이었다"고 밝혔다. 경찰신고는 오후 3시19분께 지나가던 승용차 운전자가 112를 통해 신고했다.
음식점 사장은 우선 가족에게 연락했다. 형편이 어려움에도 항상 웃음을 띠던 A 씨 아내의 얼굴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6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안전용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떨어지면서 머리 쪽이 흙에 묻히면서 그는 질식사했다. 사장은 눈물도 말라버린 A 씨 아내를 다독이며 병원에 그의 시신을 옮겼다. A 씨를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본 순간이다. 가족들은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아 그를 장례식장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는 아들이자 아버지, 남편, 사위였다. 이웃이며 친구였다. 그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50대 아저씨였다. 관리감독을 잘못한 인천시나 안전 불감증에 걸린 시행사인 포스코건설, 시공사 씨엔아이의 초기 대응의 미숙, 또는 자연적인 현상이 사고 원인일 수도 있다. 결국 누군가 책임을 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뒤늦게 안전검사를 하고 현장을 방문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사고난지 사흘 뒤 밤늦게 그의 집을 갔다. 가로등도 없는 새로 지은 빌라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그의 아들은 문 앞에서 명함을 건네는 기자에게 "지금은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며 정중히 인터뷰를 사양했다. 아들을 참 잘 키웠다. 기자는 그의 얼굴을 모른다. 아니 일부러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절대로 잊지 못할 잔영으로 남을 것 같았다. 기자에게 눈물이란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다. 어쩌면 동년배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를 그를 취재하며 기자는 허공을 몇 번이고 올려보았다. 빌라를 나와 끊었던 담배를 물었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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