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당한 ‘80초 신고’… 경찰 거짓말 일관
“여기 못골놀이터 전 집인데요 지금 성폭행당하고 있거든요”…
강제로 문 여는 소리 들린 후 “잘못했어요 아저씨 잘못했어요”
경기 수원시 주택가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피살 사건과 관련한 경찰의 해명이 상당수 거짓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경찰은 피해자가 성폭행당한 사실을 말했을 뿐 장소를 전혀 특정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동아일보 확인 결과 피해자는 80초에 걸쳐 상당히 구체적으로 범행 지점을 경찰에 알린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또 형사과 강력팀 35명을 모두 동원해 범행현장의 상가와 편의점, 불 켜진 주택을 샅샅이 탐문 조사했다고 주장했지만 동아일보가 4일과 5일 범행현장 주변 주민들을 직접 취재한 결과 주민들은 이를 대부분 부인했다. 심지어 경찰이 가봤다는 주점의 주인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경찰의 초동수사가 부실했을 뿐 아니라 사건이 알려진 뒤에도 이번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던 셈이다.
○ “지동초등학교 좀 지나서 못골놀이터 가는 길” 신고가 “장소 모른다”로 둔갑
그동안 경찰은 피해자 신고 내용에 대해 단지 “성폭행당했다. 누군지도 모르고 장소도 모른다”는 15초 정도의 짤막한 내용이 전부고 장소는 나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1일 피살된 A 씨(28·여)는 살해되기 직전 112 신고를 통해 1분 20초동안 접수자와 12번의 문답을 거치면서 상세하게 범행 장소를 알렸다.
A 씨는 1일 오후 10시 50분 58초에 경기지방경찰청 112신고센터에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저 지금 성폭행당하고 있거든요. 어느 집인지는 모르겠어요. 지동초등학교 좀 지나서 못골놀이터 가는 길쯤으로요”라고 밝혔다. 범행 장소는 A 씨의 말대로 지동초등학교 후문에서 50여 m 떨어져 있는 왕복 2차로 도로와 맞붙은 3층의 다가구주택이었다. A 씨가 경찰에 알린 범행 지점은거의 정확했던 셈이다. ○ “35명 동원 샅샅이 탐문” 경찰 주장에 주민들 “탐문 거의 없었다” 반박
경찰은 정확한 위치를 몰라 112신고센터에 뜬 휴대전화 기지국을 중심으로 반경 500m 범위 내의 후미진 골목길과 공터를 집중적으로 살피되 상가와 편의점, 불 켜진 주택을 상대로 탐문조사를 벌였다고 밝혔다.
경찰은 신고자가 ‘집’ ‘지동초등학교를 좀 지나서’라고 특정 장소를 지목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물망식으로 탐문 조사해 범행 장소를 빨리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불 켜진 집을 탐문했다고 경찰은 주장했지만 이것도 거짓이었다. 범행 현장 주변 50여가구 주민을 상대로 본보 기자들이 직접 조사한 결과 당일 밤과 새벽 경찰이 방문하거나 탐문한 집은 한 곳도 없었다. 당시 불이 켜진 집도 10여 곳이었다. 범행현장 뒷골목에 사는 이모 씨(51)는 “잠들기 전까지 경찰 온 적 없다. 경찰이 빨리 움직였어야 되는데 늦었다고 주민들끼리 얘기한다”고 말했다.
특히 범행이 이뤄질 당시 범인 우모 씨(42·조선족·구속) 집은 불이 켜져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잔인하고 흉측하게 훼손된 A 씨의 시체로 봤을 때 우 씨는 불을 켜놓고 거의 밤새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을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우 씨 집을 탐문하지 않았다. 경찰은 “우 씨 집은 철문을 열고 들어가야 나오기 때문에 밖에선 불이 켜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또 2일 오전 2시 30분경 범행 장소에서 250여 m 떨어진 인근의 한 주점을 탐문했다고 5일 밝혔으나 해당 주점 주인은 “당일 오전 4시까지 영업을 했지만 경찰이 찾아온 적이 없으며살인사건도 이틀이 지난 뒤 알았다”고 말했다. 거짓 해명의 연속이자 구멍이 숭숭 뚫린 탐문조사였던 셈이다. ○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목소리
A 씨는 경찰이 누가 성폭행을 하느냐고 묻자 “어떤 아저씨예요. 빨리요, 빨리요. 모르는 아저씨예요”라고 급박하게 대답했다. 이어 “내가 잠깐 아저씨 나간 사이에 문을 잠갔어요.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 잘못했어요. 아저씨 잘못했어요”를 끝으로 신고전화는 끊겼다. 1분 20초가 흐른 오후 10시 52분 18초였다.
A 씨의 신고전화 내용은 우 씨가 잠시 현관문을 열고 나간 사이 절박하고 다급한 심정으로 신고를 하는 과정과 우 씨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A 씨가 공포에 질린 장면이 고스란히 연상됐다. 신고 내용을 직접 들은 경찰들은 “A 씨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고 전했다. 경찰은 순찰차 4대를 동원해 범행 장소가 될 만한 곳을 모두 뒤졌다고 했지만 주민들은 순찰차의 사이렌조차 듣지 못했다. 주민들은 “결과적인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급박했던 순간이었는데 순찰차가 사이렌을 울렸으면 범행을 막거나 주민들의 빠른 협조가 가능했을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고 지적했다. 경찰은 “경광등은 켰지만 늦은 밤이라 사이렌을 켜면 자는 주민들이 다 깰 수 있어 자제했다”고 해명했다.
A 씨의 남동생(25)은 “당시 밤이라서 집집마다 수색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 경찰의 말에 화가 치민다. 이런 게 늑장 아니겠나. 신고 때 누나가 지동초등학교를 언급했는데 왜 그 근처를 먼저 안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경찰의 부실수사에 불만을 터뜨렸다.
이번 사건 수사를 지휘한 수원중부경찰서 조남권 형사과장은 A 씨의 통화내용이 공개된 5일 "사실 신고 내용을 듣지 못했다. 경찰서에 있는 112 범죄신고 접수 처리표를 보고 거기 있는 대로 언론에 답변을 한 것이 불찰"이라며 "사건을 숨기거나 거짓말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조 과장은 하루 전인 4일 "정말 간단한 신고였다. 신고 통화가 15초쯤 되는 것으로 안다. 신고내용에 정말 특정된 장소가 없었다."라고 거듭 말했다.
수원=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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