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4일. 미국에서 날아온 e메일을 보고 상념에 빠졌다. 국제탐사보도협회(ICIJ)가 보낸 메일이었다. 1996년 10월 미국 시카고 인근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여성을 치어 숨지게 한 한국인 도망자를 함께 찾아보자는 탐사보도 제안이었다.
시카고 지역 권위지인 시카고트리뷴은 지난해 봄부터 일리노이 북부지역에서 발생한 해외도피 범죄 200여 건에 대한 탐사보도 특집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한국 출신 이민자의 음주운전 사고였다. 음주 사고 후 체포된 용의자는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가 1998년 한국으로 도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시카고트리뷴은 함께 취재가 가능한 한국인 기자를 찾기 위해 ICIJ의 문을 두드렸고, ICIJ는 유일한 한국인 회원인 기자를 추천했다. 과거 ICIJ를 통해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불법 노동착취 기사를 다뤘던 경력이 고려된 셈이다.
1월 초 시카고트리뷴에 부탁해 시카고법원의 사건 기록 문서를 받았다. 도망자의 영문이름과 사회보장번호(SSN), 생년월일 등이 기재돼 있었다. 하지만 주민등록번호는 물론이고 정확한 한국 이름도 알 수 없었다. 영문 이름과 생년월일만 갖고 여러 경로를 확인한 결과 1998년 그런 이름의 남자가 한 명 입국한 사실을 확인했다.
미국 외교 관계자를 통해 도망자의 미국 사회보장번호를 토대로 관련 정보 조회를 부탁했다. 그러자 도망자 또는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2003년 미국 이민국에 전화해 “그린카드(미국 영주권) 상태가 어떠냐. 나는 성동구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확인됐다. 성동구에 문의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 이민기록을 토대로 마침내 주민번호를 찾아냈다. 수소문 끝에 도망자가 경기 용인시에 살고 있는 S 씨(73)일 확률이 크다는 심증을 굳혔다.
2월 중순 용인시 ○○동 아파트의 등기부등본을 떼어본 결과 전세입주자 이름이 도망자와 같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토요일 오후인 2월 18일 용인의 아파트 입구 우체통을 본 뒤 S 씨가 지금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다음 날 저녁 S 씨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15년 전에 일어난 일을 지금 왜 얘기하나….”
닫힌 문 너머 S 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짧은 비명과 같은 대답을 통해 자신이 도주 당사자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당신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니다. 미국 기자들은 당신이 막대한 재산을 처분해서 현금화한 뒤 돈을 들고 도망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어떤 입장인지 듣고 싶어서 왔다.”
한 시간을 넘게 설득했지만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문밖에 연락처를 남겨두고, 혹시 생각이 바뀌면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첫 반응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과 1시간 만에 전화가 왔다. 도주 14년 만에 마침내 입을 연 순간이었다. “내가 돈을 갖고 도망쳤다는 건 정말 억울하다.”
S 씨는 마음을 어느 정도 가다듬은 듯했지만 목소리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시카고 근교 자택과 상업용 부동산 등을 포함 100만 달러(약 11억 원)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재판이 진행되던 1998년 자산을 모두 현금화해 한국으로 도주했다는 미국 언론의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며 울분을 터뜨린 것이다. 그 울분이 자신이 음주운전 치사 사고를 일으키고 도망친 사람임을 자인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다음 날 다시 전화를 걸어와서 직접 만나자고 했다.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자세히 소개했다.
S 씨는 1981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당시 아내가 이민을 원하지 않아 아이들 셋을 데리고 먼저 미국으로 들어갔다가 1년 뒤에 아내를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3년간 호텔 청소부를 했다가 신발가게를 운영하고, 은행 대출로 세탁소 임대업을 했지만 사고를 내면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망가졌다.
“기억도 하기 싫은데…. 그런데 나도 억울하다고 얘기해야겠다. 그건 사고였다. 술도 소주 2잔밖에 안 마셨고, 깜깜해서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미국에다 다 얘기했다. 캄캄해서 보이지 않아 사고가 난 것이라고. 그런데 원인은 내가 술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단순 과실치사로 인정받기 어렵고, 음주운전에 따른 가중 처벌을 우려해 도주했다는 주장으로 들렸다.
미국 사건기록에 따르면 S 씨는 1996년 10월 시카고 시 쿡 카운티에서 음주운전으로 에콰도르 출신 이민 여성인 호텔 청소용역원 매니저 소냐 나란호 씨(당시 43세)를 치어 숨지게 하고 2명을 다치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법원기록에는 S 씨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법적 허용치의 2배에 가까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S 씨는 당시 연간 1만2000달러(약 1400만 원)를 버는 구두가게 소유자라고 신분을 밝혔고, 법원은 2500달러(약 280만 원)의 보석금으로 그를 풀어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재판이 진행되던 1998년 한국으로 도주했다.
S 씨는 기자와 만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제가 죄인인 거죠. 어쨌든 운전을 했으니까. 요즘 성당에 가서 그 가족한테 매일 기도합니다. 내 과실이니까.”
S 씨는 사고 후 아내와 이혼했으며, 위자료와 자녀들 사업자금, 변호사 비용 등으로 재산을 모두 써버린 뒤 홀로 한국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14년간 학교 경비원 등의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친척들의 도움으로 혼자 어렵게 생활해왔다고 주장했다.
기자가 마침내 도망자를 찾았다는 소식에 피해자 나란호 씨의 딸 브렌다 몰리나 씨는 “오래전에 이뤄졌어야 할 일을 추진하는 데 16년이 걸렸다는 게 슬프다”며 미 수사당국이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에 분노를 나타냈다.
미 수사 당국은 채널A와 시카고트리뷴이 해외도피범죄자 탐사 보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사건 재조사에 들어갔다. 시카고트리뷴은 9일자 1면 머리기사와 8면 관련기사를 통해 “S 씨 사건은 미국 형사 사법체계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내줬다”고 질타했다.
일리노이 검찰청 파비오 밸런티니 형사부장은 “미 법무부가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면 한국 정부가 S 씨를 체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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