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에는 나를 안으려고 하고 뽀뽀를 하려고 더럽게 내 몸에 침을 묻히려는 게 너무 싫었다.”
16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북 영주시의 중학생 이모 군(14)이 유서에 밝힌 자살 이유 중 일부다. 이 군이 이런 괴로운 일상을 털어놓았을 때 주위에선 ‘그 나이 땐 다 그런 것’이라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가해자나 제3자에겐 ‘작은 괴롭힘’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매일같이 피해를 당했던 이 군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청소년들은 괴롭힘 그 자체보다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절망을 느낄 때 생의 의지를 내려놓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작은 괴롭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이 군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청소년들이 잇따를 것이란 얘기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이 1월 전국 초중고교생 91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학교폭력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폭력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식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피해학생(1677명)의 31.4%는 ‘괴롭힘 탓에 자살을 고려했다’고 답할 정도로 고통을 느꼈지만 가해학생(1377명)의 34.3%는 가해 이유 1순위로 ‘장난’을 꼽았다. 가해자의 ‘장난’이 피해자에겐 자살을 떠올리게 하는 치명적 괴롭힘인 것이다.
청소년 상담시설에 들어오는 상담의 대부분도 지속적인 ‘작은 괴롭힘’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청예단에 따르면 하루 평균 100통씩 걸려오는 상담전화 중 대부분이 ‘친구가 자꾸 듣기 싫은 별명을 부른다’ ‘짝꿍이 매일 연필을 가져가 돌려주지 않는다’ 등 성인들이 보기엔 사소한 내용들이다. 한국청소년상담원 관계자는 “‘머리에서 냄새가 난다’는 친구들의 놀림을 들은 여중생이나 ‘재수 없다’는 문자를 반복적으로 받은 여고생이 ‘죽고 싶다’며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자살한 이 군도 가해 학생들이 뒷자리에서 연필로 꾹꾹 찌르거나 미술시간에 붓으로 물을 튀기는 장난을 계속하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신체적 폭행이나 협박보다 가볍지만 지속적인 괴롭힘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명백한 폭행은 피해 사실이 외부로 드러나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사소한 괴롭힘은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무기력감을 느낄 때 청소년들이 자살이란 극단적인 돌파구를 떠올린다고 설명했다.
○ 청소년의 뇌, 스트레스에 특히 취약
청소년들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이기 때문에 외부 스트레스에 성인들보다 훨씬 취약하다. 사춘기에 감정적으로 예민한 데다 작은 스트레스가 누적돼 한계에 이르면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서유헌 서울대 의대 교수는 “성인의 뇌는 자극적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신축성이 있는 반면 청소년은 뇌가 성장하고 있어 작은 스트레스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적응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성적과 외모 스트레스가 본격화되는 중학생 시기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은 사소한 장난도 심각한 험담으로 받아들여 공격받았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 고민 털어놓을 ‘정서적 쿠션’도 없어
더 큰 문제는 스트레스에 지친 청소년들이 심리적 안식을 얻을 ‘정서적 쿠션’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부모와 교사가 아이들의 성적과 진학에만 관심을 두다 보니 청소년들이 그 외의 고민을 얘기했을 때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이윤조 서울시청소년상담지원센터 상담팀장은 “아이들의 고민에 대해 부모들이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신경 끄고 힘내라’며 무성의한 위로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반복되면 아이들은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정지영 기자 jjy20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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