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절에 머물며 첫 소장(訴狀)을 작성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만시지탄이지만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과 동아시아의 평화공동체를 위한 소중한 계기가 마련된 만큼 실질적인 성과가 나오도록 한일 양국 정부와 국민의 관심이 높아졌으면 합니다.”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자에 대한 미쓰비시(三菱)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온 지 이틀이 지난 26일 최봉태 변호사(50·대구 법무법인 삼일)는 “전쟁피해자에게 정의가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순리를 법원이 인정한 재판”이라면서도 “소송 당사자들(원고)이 이미 세상을 떠나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 소송을 주도한 최 변호사는 2000년 2월 소송 자료를 한 가방 챙겨 대구 달성군에 있는 신라 고찰 남지장사에 100일간 머물며 A4용지 70쪽 분량의 소장을 작성했다. 오전 3시에 일어나 불공을 드린 뒤 원고 6명의 비참했던 삶을 생각하며 비장한 각오로 썼다.
그가 이 절에서 소장을 쓴 이유는 호국 사찰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명대사 유정은 이곳에서 승병과 의병 3000여 명을 양성했다. 이 때문에 왜군이 절을 불태웠지만 ‘항일의 얼’이 흐른다. 그해 5월 1일 노동절에 ‘호국’의 심정으로 부산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부산지법에 소송을 낸 것은 미쓰비시중공업 사무소가 부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판결 후 주위에서 ‘고생 많았다’ ‘큰일 해냈다’는 말을 적잖이 들었지만 대한민국 변호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30대에 시작한 소송이 50대에 들어 승소의 전기를 마련했지만 개인적인 사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강제 동원된 분들이 원통한 마음으로 자꾸 세상을 떠 ‘왜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런 판결을 받아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원통함에 오히려 죄인이 된 느낌이다.”
최 변호사의 사무실에는 그동안 소송 자료만 1만여 쪽, 소송 관련자료 3만여 쪽 등 5만 쪽가량의 서류가 빼곡히 서가에 꽂혀 있다. 이를 쌓으면 무려 5m에 이른다. 12년간 그의 혼과 땀, 정성이 배어 있는 서류들이다. 1, 2심 패소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변호사가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대법원에서도 패소했다면 부끄러워서라도 더는 변호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소송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994∼1997년 도쿄대에 유학하던 시절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 변호사 200여 명이 전후 보상을 놓고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책임을 묻는 소송을 치열하게 하고 있었다. 너무 창피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변호사인데 이 문제에 이렇게 무심한 게 도대체 말이 되나’라는 생각에 잠도 오지 않았다. 이번에 승소한 것도 일본 변호사들이 대응 논리를 충실하게 제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능환 대법관이 우리 헌법 정신을 기준으로 새롭게 판결한 것은 한국의 사법사상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일제의 전쟁피해 보상은 ‘신국채보상운동’이라고 했는데….
“1907년 2월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가 강제로 떠안긴 국채 1300만 원을 갚기 위한 주권수호 운동이었다. 반면 이번에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피해 보상을 위한 노력은 우리가 반드시 받아내야 하는, 일본이 반드시 우리에게 갚아야 하는 ‘일본의 국채’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를 ‘신국채보상운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1997년 귀국 후 대구에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창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송에 뛰어들었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곳인 만큼 대구에서 일하는 변호사로서 그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자존심이 끈질긴 소송의 에너지였다.
―왜 미쓰비시중공업을 첫 번째 타깃으로 삼았나.
“피해자들은 이 회사를 ‘제1전범’이라고 부른다. 국가적으로는 1945년 8월에 광복이 됐지만 강제동원(징용)된 분들에게 아직 광복이 오지 않았다. 이번 판결은 강제동원 후 70여 년을 이어온 한(恨)을 비로소 조금 풀어준 의미가 있다.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구체적인 보상 등 결과를 끌어내야 한다. 이제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보상 문제가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큰 오해다. 한일협정과는 별개로 개인의 피해보상 청구권리는 소멸되지 않았다는 게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 취지다. 원폭 피해자들에게 일본 정부가 수년 전부터 월 50만 원 정도를 주고 있는데 한일협정으로 다 끝났다면 왜 이런 보상을 하겠나. 개인청구권리는 명백하게 살아있다.”
그는 올해 9월 11일 도쿄지방재판소의 한일협정과 관련된 일본 정부의 내부 문서 공개 여부 판결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부 문서에는 전쟁피해자와 관련한 보상 문제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과제가 남아 있나.
“중국과 베트남, 대만 등 일본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 국가들이 이번 판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본이 점점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고 피할 수도 없다. 한일협정과 관련이 있는 포스코가 이번 소송 후 이 문제를 다루는 재단 설립을 위해 100억 원을 출연한다고 하는데 좀 더 책임을 느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 사회가 개인청구권이 살아있다는 양국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법치주의다. 또 도리이고 인륜이다. 무슨 재판을 통해 시간을 끄는 비열한 행태를 보이면 아시아에서 일본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최 변호사는 12년 동안 소송을 진행하고 결국 승소했지만 개인적으로 단돈 10원도 대가가 없다. 오히려 개인 돈을 들여 소송을 해왔다. 전쟁 피해와 관련해 현재 진행하고 있는 10여 건의 소송도 마찬가지다. 바람이라면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과 막걸리라도 한잔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 최봉태 변호사는
―1962년 대구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1989년 사법시험 합격(31회) ―1997년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창립 ―2001∼2004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추진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2005∼2006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2010년∼현재 대한변협 일제피해자 인권특별위원회 위원장 ―2011년∼현재 외교통상부 한일청구권협정 법률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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