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저의 소망은 모두 한국이 민주적으로 통일을 이뤄 평화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한 미국인 판사가 한국의 교육과 선교에 평생을 바친 할아버지와 한국의 평화를 지키다 전사한 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4일까지 한국을 방문한 미국 오하이오 주 법원의 스티븐 쇼 부장판사(63). 그는 방문 기간 부인 버지니아 쇼 등과 함께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친이 묻힌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역을 참배한 뒤 아버지의 동상과 전사기념비가 있는 은평구 평화공원, 자신이 다녔던 서울 외국인학교, 아버지가 해군 민관인 교관으로 활동했던 진해 해군사관학교 등을 둘러봤다.
마지막 일정은 3일 6·25전쟁 때 전사한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세운 ‘해밀턴기념예배당’(현재의 목원대학교회)이 있는 대전의 목원대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이 교회에서 기념 예배를 드린 뒤 목원대가 아버지를 기려 세운 ‘해밀턴 쇼 대위 전사기념비’를 둘러봤다. 할머니와 어머니 등이 설립해 운영하던 전쟁미망인 자립 터전인 ‘성화원’(현재의 중촌교회 자리)도 방문했다.
쇼 일가의 3대에 걸친 한국과의 인연은 할아버지인 윌리엄 얼 쇼가 평양의 광성보통학교 교사로 한국에 온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생 교육과 함께 선교활동을 펼치던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주한미군에 자원입대했다. 한국군에서 그는 군목제도를 처음 도입했으며 1954년 목원대 전신인 ‘감리교 대전신학원’을 설립할 때 창립 이사로 참여하고 신학 교수도 지냈다.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인 해밀턴 쇼는 한국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1922년 6월 평양에서 태어나 1944년 미국 해군 장교로 입대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1948년부터 경남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민간인 교관으로 함정 운용술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후 미국 하버드대 철학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미 군 복무를 마친 상태였지만 “태어나 자란 나라의 고난을 외면할 수 없다”며 해군에 자원입대해 참전했다. 당시 그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정보 장교로 활동하며 맥아더 장군을 도와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했으나 서울 탈환작전 때 녹번리 전투에서 28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1956년 정부는 그에게 금성을지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는 은성훈장을 각각 추서했다.
쇼 판사는 1956년 선교와 교육을 위해 한국으로 건너온 어머니를 따라 들어와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판사가 됐다. 목원대 김원배 총장은 교회를 방문한 쇼 부장판사 부부에게 감사패를 전달한 뒤 “쇼 일가가 한국과 목원대에 보여준 숭고한 희생과 위대한 사랑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말했다.
쇼 판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같은 분들이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기억되길 기대한다”며 “통일이 되면 한국의 젊은이들과 같이 평양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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