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2학년 두 딸을 둔 어머니 서모 씨(43·경기 고양시). 그는 얼마 전 집안에서 걸레질을 하다가 우연히 두 딸의 대화를 엿듣고 고민에 빠졌다. 딸들의 대화 내용은 이러했다.
동생: 언니! 여름방학에 공부 열심히 할 건데 수학부터 할까, 영어부터 할까?
언니: 초딩(‘초등학생’을 일컫는 은어)이 여름방학에 웬 공부? 그냥 놀아. 공부는 중학생 되면 자연스레 ‘빡세게’(‘열심히’를 뜻하는 은어) 하게 돼.
동생: 언니는 중학생인데 공부 열심히 안 하잖아.
언니: 야, 내가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학교 끝나면 곧장 학원(종합보습학원) 가지. 오후 8시에 집에 오면 30분 뒤에 엄마한테 학원에서 푼 문제랑 배운 내용 보고해야지. 화요일 금요일에는 학원 끝나고 오후 9시부터 영어 과외하지. 토요일에는 아침에 학교 가서 방과후학교 글짓기수업 듣고 점심 먹고 오후 3시부터 피아노레슨 받아야 하지. 휴…. 이건 뭐 도저히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시간이 없어.
동생: 언니는 뭐 하고 싶은데?
언니: 응? 음, 잘 모르겠는데…. 솔직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할 시간도 없다.
동생: 치….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방문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엿듣던 서 씨는 막내딸의 질문과 답이 어쩐지 큰딸보다 의젓해 보여 피식 웃음이 나왔다. 큰딸이 학교수업과 학원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후 막내딸의 결정적 한마디가 이어졌다.
동생: 그러면 엄마한테 학원이나 과외나 레슨 중에 하나만 줄여달라고 말해.
언니: 말하면 뭐하냐. “다 너를 위한 투자다” “이 정도는 해야지 나중에 좋은 대학도 가고 멋진 직장도 구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면서 잔소리만 할 게 뻔한데.
동생: (잠시 골똘히 생각한 후) 엄마한테 학원비나 과외비나 레슨비 중에 하나만 아껴서 매달 은행에 적금으로 맡겼다가 언니가 대학생 되면 한꺼번에 달라고 해. 나중에 언니가 돈을 많이 버는 거나 은행에서 돈을 많이 찾는 거나 돈 많이 받는 건 똑같을 거 아냐?
막내딸의 말이 엉뚱하긴 하지만 일리도 있다고 생각한 서 씨. 적지 않은 돈을 들여가며 아이가 원하지 않는 공부를 시키기보단 그 비용을 고스란히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딸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 그것을 밀어주는 데 쓰는 것이 훨씬 현명하고 현실적인 투자가 아닌가.
며칠 뒤 서 씨는 큰딸과 상의 끝에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도록 했다. 월 40만 원이던 레슨비는 큰딸 모르게 적금통장을 만들어 매달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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