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는 장사꾼의 익숙한 말투. 하지만 뭔가 다르다. 가녀린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앳된 소년이 손뼉을 치며 옷을 팔고 있었다. 서울 방배초등학교 6학년 박재윤 군(13)은 이날 동생 박서윤 양(12)과 함께 집에서 가져온 헌옷을 팔고 있었다. 웬만한 장사꾼 뺨치는 실력 때문인지 구경꾼이 계속 몰려들어 이 옷 저 옷 들쳐보며 흥정을 이어갔다.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방배동 방배경찰서 정문 맞은편에 열린 벼룩시장의 모습. 서초구는 매주 이곳에서 ‘토요 벼룩시장’을 열고 있다. 1km가량 이어진 벼룩시장 한편에는 박 군처럼 노란 조끼를 입은 아이들이 모여 저마다 가져온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 고사리손으로 돈 벌어 기부
서초구 초중고교생 70여 명이 모인 이 자리는 ‘어린이·청소년 벼룩시장’. 매주 토요일 열리는 토요 벼룩시장과 달리 이곳은 한 달에 한 번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3시간 동안 열린다. 이날 박 군처럼 벼룩시장에 참여한 학생들은 각자 집에서 쓰던 각양각색의 물건을 팔았다. 작아 입을 수 없게 된 옷부터 세계문학전집 만화책 학용품이 곳곳에서 손님을 기다렸다. 가족이 버리려고 내놓은 구두나 가방을 받아와 파는 학생도 있었다. ‘균일가 1500원’이라는 아기자기한 안내문구를 써놓은 학생도 눈에 띄었다.
어린이·청소년 벼룩시장의 특별함은 물건을 팔아 남긴 수익금을 기부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탈북학생을 비롯해 해외 저개발국가 어린이에게 최소 50%에서 100%까지 본인이 원하는 만큼 수익금을 기부할 수 있다. 이날 처음 벼룩시장에 참여했다는 박 군은 세 시간 동안 열심히 헌옷을 팔아 남긴 2만3000원을 전액 기부했다. 박 군의 여동생은 1만4500원 중 50%를 기부했다. 박 군은 “연말에 구세군 냄비나 사랑의 열매(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같은 곳에 용돈을 기부해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돈을 벌어 기부한 건 처음”이라며 “소중한 곳에 쓰일 돈을 마련한다는 생각에 옷 파는 일이 재밌고 보람 있었다”고 말했다.
○ 5년 동안 이어온 참여형 기부교육
이날 벼룩시장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렸을 적 건너가 생활하다 돌아온 교포 2세 학생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현재 서울에 있는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학생 6명이 함께 참여해 영어책을 비롯해 미국 학교에서 쓰던 교과서를 팔아 구경꾼들의 인기를 모았다. 이날 국제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은 EPS 아카데미의 안제프리 씨(27)는 “매주 다른 봉사활동에 참여하는데 이번 주는 기부 벼룩시장에 오게 됐다”며 “오늘 번 돈 20만 원 중 10만 원을 기부하고 나머지는 모아뒀다 다른 곳에 기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서초구는 2008년부터 시작한 어린이·청소년 벼룩시장에 5년 동안 930명이 참여해 약 700만 원을 기부했다고 설명했다. 기부금은 서초구 자원봉사센터를 통해 사단법인 두리하나와 아시안브릿지에 전해져 탈북청소년과 캄보디아 아이들을 돕는다. 탈북청소년에게는 교육지원금을 전달하고 캄보디아에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전기발전기와 영어사전을 전한다. 어린이·청소년 벼룩시장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자원봉사 포털사이트(1365.go.kr)를 통해 신청하거나 서초구 자원봉사센터(02-573-9251)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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