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의 눈물… 밥 해먹이며 대학원 4곳 공부시켰는데
노숙인 위해 살겠다는 아들… “보지말자”
子의 눈물… 아버지, 10년만에 진심 알고 “미안했다”
이젠 뇌중풍… 도와드릴 돈 없어 눈물만
덥수룩한 하얀 수염과 은빛 곱슬머리, 온화한 미소. 산타클로스를 연상시키는 박희돈 목사(56)가 19일 낮 서울 영등포역 광장에 나타나자 노숙인들이 모여들었다. 박 목사는 낮이면 역에 나와 노숙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이날만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그의 가슴속에서 세 글자가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
‘영등포역 털보형님’이라 불리는 박 목사는 11년째 노숙인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그의 인생은 2001년 12월 오전 3시 영등포역 앞에서 빨간 원피스 하나만 걸친 채 쓰레기통을 뒤져 남은 컵라면 국물을 허겁지겁 마시던 여자 노숙인을 만난 뒤 바뀌었다. 그 노숙인은 “저녁에 나오면 남자 노숙인이 끌고 가 성폭행을 하기 때문에 새벽에 몰래 나와 쓰레기통을 뒤진다”고 했다. 철학박사로 병원 목사 생활을 하던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내가 사회복지학 강의를 하는 교수였는데 세상은 학계에 보고도 된 적이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어요. 그때 결심했죠. 노숙인을 위해 살다 죽자고.”
그는 전 재산과 밥사랑열린공동체를 설립해 모은 후원금 등을 모두 노숙인 급식에 쏟아 부었다. 담임목사로 있던 교회의 신도들은 헌금이 모두 급식비로 들어가자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친구들도 그에게 “미쳤다”고 했다. 아내와도 이혼했다. 모두가 외면한 충격에 왼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가장 힘든 건 아버지(81)의 외면이었다. 경북 군위가 고향인 그는 중학교 때 대구로 유학을 오면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손수 밥을 지어주던 아버지는 그가 대학원 4곳을 마칠 때까지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런 그가 ‘노숙인을 위해 살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다시는 집에 오지 말라”며 내쳤다.
아버지가 마음을 연 것은 지난해 말. 박 목사가 재개발 지역의 쓰러져가는 한옥에서 노숙인 10여 명과 엉켜 살며 매일 밥 500인분을 지어 먹이는 ‘한국의 진짜 목사’라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뒤였다. 아버지는 “몰라줘서 미안했다”며 아들을 안고 울었다.
행복도 잠시, 4일 아버지가 심근경색과 뇌중풍으로 쓰러졌다. 그가 대구의 한 병원 중환자실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겨우 의식을 되찾고 마비된 입으로 아들을 부르는 듯 “어버버버”했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게 만든 건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보다 돈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쓰러진 뒤 2주간 청구된 병원비는 800여만 원. 병원에서는 “얼른 돈을 내고 요양원으로 옮겨 달라”며 퇴원을 압박하고 있다. 노숙인에게 모든 걸 퍼주고 산 터라 그는 가진 돈이 없다.
여름철 후원금은 월 800만 원가량으로 하루 500명분 식사 재료비 40만 원에 노숙인들과 함께 거주하는 집, 밥 짓는 공간 등의 월세 200여만 원 등을 쓰고 나면 적자다. 그는 19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11년 만에 처음으로 울면서도 “내 삶의 최우선은 노숙인을 굶기지 않는 것이기에 후원금은 한 푼도 쓸 수 없다”고 했다.
박 목사는 무거운 마음을 숨긴 채 이번 주말 대구 Y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다시 보러 갈 예정이다. 후원 계좌는 우리은행 891-04-100397(예금주 한국기독교복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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