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전 11시경 울산 동강병원 중환자실. 전날 오전 2시 반경 자신의 화물차 안에서 잠을 자다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졸지에 화(禍)를 당한 정춘회 씨(41·사진).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멍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정 씨는 당시 타이어 등이 타면서 나온 유독가스를 마셔 산소호흡기를 코에 꽂고 있었다.
당시 정 씨가 잠을 깬 것은 뜨거운 열기 때문이었다. “눈을 뜬 순간 불길이 운전석 옆과 앞 창문으로 치솟고 있었다”는 정 씨는 “열기와 유독가스가 한꺼번에 차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탈출하기 위해 유리창을 발로 찼지만 깨지지 않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불길이 점점 거세지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부인(40)과 아들(15·중3), 딸(13·중1) 등 가족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숨을 참다 도저히 안돼 유독가스를 몇 모금 마셔 정신도 점점 혼미해졌다.
그는 “가족을 생각하며 태권도로 배운 발차기로 있는 힘을 다해 차니 조수석 유리창이 기적처럼 깨졌다”고 했다. 오른쪽 발뒤꿈치에는 맨발로 유리를 차면서 생긴 타박상이 남아 있었다. 무사고 운전사인 그는 “사고도 아닌 방화로 추정되는 불 때문에 차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니 내 몸이 타는 느낌이었다”고 몸서리쳤다.
정 씨는 사고 전날인 23일 오후 6시경 울산 북구 양정동 현대하이스코에서 강관을 싣고 나와 효문동 현대글로비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화물연대의 파업이 다음 날 오전 7시로 예고된 상황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곳에 주차한 것이다. 집이 대전인 정 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울산에서 오후 6시경 짐을 싣고 저녁식사를 한 뒤 차 안에서 잠을 청했다. 여관에서 편하게 잠을 잘 수도 있지만 오고가는 교통비에 5만 원 안팎인 여관비가 아까워 늘 차 안에서 잠을 잤다.
그는 화물연대 소속 조합원은 아니다. 차에서 잠을 잔 것도 서울까지의 장거리 운행에 대비하면서 고속도로 통행료 할인 시간(오후 9시∼다음 날 오전 6시)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이들 시간대 할인율은 20∼50%다.
그는 “경찰 수사로 방화범이 잡힌다면 ‘화물차 하나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나 같은 운전사에게는 생명줄과 같은 화물차에 왜 불을 질렀느냐’고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거나 조금 늦게 잠에서 깼더라면 죽었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고 소식을 듣고 대전에서 달려온 부인 이모 씨는 “유독가스를 얼마나 마셨는지 지금도 침에 그을음이 섞여 나오고 있다”며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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