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m높이의 아파트 베란다에 한 아이가 매달려 있다. 이를 뒤늦게 발견한 젊은 엄마는 비명을 지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이 빠진 아이는 베란다를 잡고 있던 손을 놓게 되고 이를 지켜보던 엄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는다. 하지만 멀리서 이를 본 슈퍼맨이 검정색 뿔테 안경을 벗어던지고 날아온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아이를 구한 슈퍼맨은 울고 있는 엄마 품에 아이를 돌려주고는 웃으며 사라진다. 영화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일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일어났다.
현실 속에서 나타난 슈퍼맨은 무술을 익힌 적도 없는 평범한 40대 가장이었다. 고3과 대학생 두 아들의 아버지인 이준희 씨(49·대구 달서구 죽전동)는 23일 오전 8시 10분경 대구 달서구 죽전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 서 있었다. 토요일이었지만 고 3인 막내아들을 학교에 태워주기 위해서다. 차를 타려는 순간 한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다가 밖으로 떨어진 빨래를 줍기 위해 집을 나왔던 박모씨(33·여)의 비명이었다. 아파트 6층 자신의 집 베란다에 네 살짜리 아들 남모 군이 매달려 있었던 것. 몇 년 같은 몇 초가 흘렸을까. 박 씨의 비명소리를 듣고 30m 가량을 달려온 이 씨가 남 군이 매달린 베란다 밑에 축구 골키퍼 자세로 두 팔을 벌린 채 섰다. 힘이 빠진 남 군은 베란다를 잡고 있던 손을 놨고 17.5m높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씨는 무릎을 굽히며 떨어지는 남 군을 두 팔로 받아냈다. 다행히 남 군은 큰 부상 없이 목숨을 구했다. 남 군을 치료한 대구가톨릭대병원 관계자는 "추락의 충격으로 폐에 공기가 조금 들어갔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이 씨는 119구급대가 남 군을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확인한 뒤 자리를 떠났다. 섬유업체를 운영하는 이 씨는 170㎝의 키에 몸무게는 75㎏정도로 평소 축구 등으로 단련된 몸이다. 무술 등은 배운 적도 없다. 이 씨는 "당연히 할일을 한 것 뿐"이라며 "누구라도 나처럼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병원에서 퇴원하면 남 군을 만나 '살아줘서 고맙다'고 꼭 한번 안아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현재 이 씨는 당시 충격으로 인한 허리 통증으로 현재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경찰은 남 군이 빨래를 줍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간 엄마를 찾아 베란다 밖을 내려다보다 실수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