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감옥에서 더 평온해 보였다. 연녹색 수의(囚衣)를 입고 오늘도 ‘괜찮다’는 말만 계속했다. “밥은 먹을 만해?” “그럼, 잘 먹지.” 김경숙(가명·64) 씨가 하얗게 센 머리를 긁적였다. 손등의 검버섯이 더 짙어져 있었다. 수감된 지 이제 9개월. 면회 때마다 반복되는 엄마의 ‘괜찮은 척’에 딸 은희(가명) 씨는 화가 치민다. 그는 ‘아버지가 엄마를 죽일지 모른다’는 걱정을 놓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구치소에 갇히는 상상을 수없이 했는데 창 너머에 수의를 입은 사람은 엄마다. 김 씨가 딸을 다독인다. “정말 괜찮아. 여긴 안전하잖아.”》 ○ 엄마의 선택
지난해 8월 그날도 남편 정재만(가명·68) 씨는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그러곤 25cm 길이의 식칼을 빼들었다. 집 안 청소를 몇 시간째 하는데 도와주지 않는다고 부인이 불평을 한 직후였다. 김 씨는 집안 곳곳으로 도망치다 안방 장롱 앞에서 남편이 든 칼과 맞닥뜨렸다. 정 씨는 발로 부인의 무릎을 차 주저앉혔다. 칼끝은 김 씨 눈앞에 와 있었다.
“눈을 찔러 소경을 만들까, 배때기에 난도질을 할까.” 김 씨는 바닥에 누워 사정했다. “나 이빨 나가도, 연골 찢어져도 절대 신고 안 할게. 제발 살려줘.” 남편은 몇 분간 칼로 찌르는 시늉을 하다 서서히 지치는 듯했다. “나가면 죽여 버린다.” 남편은 방바닥에 누우며 다리를 김 씨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칼은 바로 꺼낼 수 있도록 칼자루가 보이게 장판 안에 넣었다.
얼마 뒤 남편은 잠들었다. 칼로 찌른다는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김 씨의 손가락과 왼팔 가슴 등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여럿 있었다. 김 씨는 자포자기 상태로 한동안 멍하니 있다 뭔가를 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청소를 하느라 열어놓은 장롱에 넥타이 3개가 있었다. 김 씨는 숨을 멈춘 채 팔을 뻗어 그중 한 개를 빼냈다.
○ 아버지의 발소리
아버지는 유명 공기업에 다녔다. 은희 씨는 아버지가 출근한 직후 1시간이 가장 좋았다. 하루 중 긴장이 풀리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점심부턴 마음이 무거워지고 저녁이 되면 집 주변 발소리에 귀가 쏠렸다. 아버지는 술을 싫어해 대부분 맑은 정신으로 귀가했다. 그의 구두 소리는 점점 커지다 문 앞에서 ‘딱’ 소리를 내며 멎었다. 열쇠를 찔러 넣는 ‘드르륵’ 소리는 은희 씨의 심장을 관통했다.
가족들은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식사를 하면 밥상이 뒤집히는 일이 많았다. 누군가가 젓가락질을 서툴게 하거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무심코 얘기하다 기습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아버지는 ‘애들 교육을 왜 이 따위로 시키느냐’며 의자나 혁대로 엄마를 때렸다. 선인장 화분을 던져 엄마 얼굴에 가시가 수북이 박히기도 했다. 집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가 아버지에겐 폭행의 핑계였다. 은희 씨는 초등학교 때 쓴 일기에 “아빠가 한 달에 한 번만 때렸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이유가 늘 궁금했지만 어느 순간부턴 주먹질이 빨리 끝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가족들은 정 씨가 차라리 술자리를 즐기길 간절히 원했다. 집에 늦게 들어오면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술에 취했을 때만 폭력적이 된다면 언제 방어가 필요할지 예측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폭력은 언제나 느닷없었다. 연탄을 옮기며 달궈진 집게로 허벅지를 찌를 듯 휘둘렀고 펜치로 생니를 뽑았다. 방문을 잠그고 숨으면 손도끼로 문고리를 내려치고 들어왔다. 성한 문이 없어 언제부턴가 숨을 곳이 없었다. 엄마는 딸들이 집에 있을 땐 아버지 손을 잡고 안방에 들어갔다. 그 안에선 ‘퍽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헉헉’ 하며 신음을 삭이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나오면 얼마 뒤 엄마가 피 묻은 수건을 들고 나왔다. 엄마는 그때마다 “이제 괜찮으니까 공부해”라고 했다.
은희 씨는 부모가 욕실에서 반나체로 있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 엄마에겐 가장 몸서리쳐지는 시간이었다. 식당일을 하는 김 씨가 귀가 예정시간을 넘겨 집에 오면 남편은 “어떤 놈이랑 있다가 왔느냐”며 표백제로 하체를 씻게 했다. 기계를 잘 다뤘던 남편은 집 전화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통화 내용을 수시로 엿들었다.
○ 반향 없는 SOS
“경찰입니다. 말씀하세요.” “아빠가 엄마를 때려요.” “어떻게 때리니?” “엄마를 칼로 찌르려고 해요.” “그래, 경찰 아저씨 보내 줄게.” “엄마 얼굴에 피나요. 살려 주세요.”
은희 씨가 경찰에 처음 신고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엄마에게 칼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30분쯤 뒤 도착한 경찰은 초인종을 눌렀다. 아버지가 인터폰 수화기를 들었다. “네? 부부싸움이라뇨. 지금 집에 혼자 있어요. 여자애요? 우리 집에 딸이 없는데….” 인터폰 화면이 꺼지자 은희 씨의 반바지가 소변으로 젖기 시작했다.
몇 년 뒤 은희 씨는 다시 용기를 냈다. 그날 엄마는 안방에서 생니를 뽑히기 직전 욕실로 도망을 쳤다. 아버지는 펜치를 손에 쥐고 욕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경찰에게 이번엔 집에 꼭 들어와 달라고 했다. 경찰관은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현관문을 두드렸다. 아버지는 욕실 문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중간에 나오면 알지.” 아버지는 지갑을 꺼내 쥔 채 현관문을 열었다.
“추운데 고생이 많으시죠?” 경찰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애들 교육 문제로 아내와 언성이 좀 높아졌습니다. 제가 잘 타이를게요.” 경찰관은 현관문 앞에 선 채 집 안을 둘러봤다. 아버지는 경찰관을 집 밖으로 잡아끌더니 지갑 속 사원증을 꺼내보였다. “내가 이 회사 차장으로 있습니다. 내 친구가 지방의원이고….” 경찰관은 몇 마디를 더 나누더니 거수경례를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때 은희 씨가 맨발로 달려 나가 경찰관의 허리춤을 붙들었다.
“신고는 제가 했는데 왜 저한테는 아무것도 안 물어보세요. 아빠가 엄마를 때렸다고요.” 경찰관은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점잖으신 분 같은데 좀 더 지켜보자. 당장 칼부림 난 것도 아닌데 우리가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기도 그렇고….”
‘쾅 쾅 쾅.’ 세 번째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이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문 빨리 여세요.” 그날 아버지는 컴퓨터 책상을 고치다 대형 드라이버로 엄마 머리를 내리쳤다. 거실 바닥에 피가 뚝뚝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도 오늘은 어찌하지 못하리라. 은희 씨는 기대했다. 그런데 그때 엄마가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물걸레로 핏자국을 닦기 시작했다.
은희 씨는 황급히 뛰어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경찰관에게 깍듯이 인사한 뒤 나가서 얘기하자며 어깨를 감쌌다. 경찰은 “가만히 계세요”라며 뿌리쳤다. 경찰은 머리에 피딱지가 앉은 엄마를 보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경찰 옆에 서 있던 아버지가 엄마의 눈을 노려봤다.
“괜찮은데….” 엄마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줌마 정말 괜찮아요?”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희 씨가 가슴을 치며 끼어들었다. “아저씨 지금 가면 우리 엄마 정말 죽어요.” 경찰관은 한숨을 쉬다 “잘 화해하라”며 돌아갔다. 엄마는 그날 처음으로 은희 씨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나 이러고 사는 거 너무 치욕스러워서 남한테 알리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네 아빠, 너 결혼식장 들어갈 때 네 손 잡아줄 사람이잖아. 나중에 늙으면 못 때릴 거야.” 엄마가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는 건 ‘도망가면 지구 끝까지 쫓아와 죽일 것’이란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 처음이자 마지막 저항
김 씨가 자신에게 다리를 올린 채 잠든 남편의 얼굴을 봤을 때 그간 폭력의 통증들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남편이 눈을 떴을 때 시작될 고통을 떠올리니 넥타이를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김 씨는 넥타이로 원 모양 매듭을 만든 뒤 남편 목에 걸고 잡아당겼다. 남편이 화들짝 놀라 깨 몸을 일으키자 김 씨는 남편의 등 쪽으로 몸을 피해 뒤에서 목을 졸랐다. 김 씨는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수박색 어둠이 깔린 하늘에 형광색 직선이 여러 개 그어지는 환영을 보았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환청까지 들리며 몸에는 힘이 솟구쳤다.
부모와 따로 사는 은희 씨는 이튿날 경찰서에서 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경찰은 잠시 머뭇했다. “어머니가 용의자로 잡혀 있습니다.”
딱 1년 전인 2010년 8월, 은희 씨는 국민권익위원회 홈페이지 신문고에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40년간 아버지의 폭행으로 무릎 연골이 찢어져 걸을 때마다 통증을 느끼고 이가 부서져 음식을 갈아서 드시면서도 자식들 상처받을까 봐 숨기시는 우리 엄마를 구해 주세요. 법은 예방과 보호가 아닌 판결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인가요.” 민원담당자는 무료 상담소에 문의하라며 전화번호 몇 개를 적은 답변을 보냈다. 은희 씨가 이미 여러 번 상담했던 곳이었다.
1심 재판이 열린 2월 어느 날, 증인석에 선 은희 씨에게 검사가 물었다. “학벌도 좋고 유학까지 다녀온 성인인데 이런 일이 벌어질 때까지 그동안 뭘 하셨습니까.” 은희 씨는 오래전 엄마가 출동한 경찰관 앞에서 ‘괜찮다’고 말할 때 느꼈던 무력감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
“이 지경까지 견뎌낸 게 나의 죄입니다. 언젠가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진 게 죄일 테죠.” 은희 씨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이 말을 내뱉지 못했다. 피고인 최후진술을 하던 엄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제가 저지른 끔찍한 잘못 사죄합니다. 스물두 살에 시집와 예순넷. 그래도 이젠 휴대전화로 누구와도 통화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어 마음이 가볍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저항은 살인으로 끝이 났다. 법원은 김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남편이 칼을 휘두르다 잠든 상태에서 범행이 이뤄졌기 때문에 ‘현재의 부당한 침해’에 해당하지 않아 정당방위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남편이 흉기를 휘두르는 동안 반격을 했어야 정당방위가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서울고등법원은 다음 달 김 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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