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목숨을 건 탈북에 나선 이유는 ‘나 아직 여기에 살아있으니 부디 우리를 기억해 달라’는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유영복 옹(83)은 1953년 7월 12일 금화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6·25전쟁 정전을 2주가량 앞둔 때였다. 이후 북한에서 광원으로 36년을 보냈다. 고된 노동과 핍박에도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국군용사’라는 긍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유 옹은 2000년 7월 탈북에 성공했다.
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국군포로 초청 오찬 간담회’에 참석한 유 옹은 “아직도 역사의 굴곡 속에서 존재마저 잊혀진 수많은 국군포로 동료들이 있다”며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북한에는 현재도 350명가량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단법인 ‘물망초’(이사장 박선영·전 자유선진당 의원)가 주최한 이날 간담회에는 1994년 목선을 타고 탈북한 고 조창호 중위를 시작으로 최근 18년간 조국의 품에 안긴 국군포로 80명 가운데 거동이 힘든 고령자와 사망자를 제외한 25명이 참석했다. 이들의 육성을 듣기 위해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 김태훈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위원장, 국제인권단체 ‘굿 오브 올(Good of All)’ 설립자 맷 데니얼스 박사 등 110여 명이 참석했다.
국군포로 출신 탈북자들은 이날 “비전향장기수는 북한으로 돌려보내면서 강산이 다섯 번 넘게 변하도록 왜 우리 얘기는 한번도 꺼내지 않았느냐”며 “국군포로 문제를 외면했던 정부는 이제라도 국군포로 생환에 적극 나서야한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국군포로인 아버지를 여의고 탈북한 손명화 씨(50·여)는 “국군포로 가족은 북한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당국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을 받는다”고 했다. 손 씨는 “저도 불법 마약 제조와 유통에 강제 동원됐다가 심한 전기고문과 구타를 당했다”며 “국군포로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꿈과 행복을 빼앗긴 채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고 울먹였다. 북한에 가족을 남겨 둔 일부 국군포로들도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박 이사장은 “‘나를 잊지 마요’라는 물망초의 꽃말처럼 탈북자, 국군포로 등 근현대사의 굴곡 속에 잊혀져 가는 ‘역사의 조난자’들을 지속적으로 돕겠다”며 “탈북 후 국가와 가족에게서까지 외면 받는 생환 국군포로들이 편안히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국군포로 요양원 건립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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