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고미석]“어머니 박경리, 김지하 사위 삼은게 불행의 시작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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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16일 03시 00분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어머니 박경리는 세상을 향해 셔터를 내린 채 글쓰기에만 몰두했다”

어머니가 아끼던 텃밭은 이제 딸의 텃밭이 됐다.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은 “텃밭에 소똥을 두 트럭이나 뿌린 덕인지 고추가 쑥쑥 잘 자란다”고 자랑했다. 원주=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어머니가 아끼던 텃밭은 이제 딸의 텃밭이 됐다.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은 “텃밭에 소똥을 두 트럭이나 뿌린 덕인지 고추가 쑥쑥 잘 자란다”고 자랑했다. 원주=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한국 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은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가 살던 강원 원주시의 집을 찾아갔다. 외동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66)이 반갑게 맞더니 부리나케 부엌으로 들어간다. 비좁은 주방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묵은지 볶음에 노각나물을 뚝딱 만들어낸다. “엄마가 하신 대로 하는 거죠. 마지막으로 병원 가기 전날까지 토지문화관 입주 작가들을 위해 정성껏 기른 무공해 채소로 음식을 만드셨죠. 글쓰기가 노동이라서 작가들은 잘 먹여야 한다고.”

거실에는 손때 묻은 필기구들과 오래된 장롱이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앞치마를 벗으며 나온 김 이사장은 “원고랑 책, 손수 바느질해 만든 옷들까지 다 그대로 두었다. 그림과 도자기 같은 골동품을 좋아하고 수집도 했는데 노년에는 애착을 버린 탓인지 누가 찾아오면 아끼던 것을 하나씩 들려 보내셨다. 나무 잘라준 일꾼에게 천경자 씨 그림을 줬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원고지 4만여 장의 방대한 분량, 26년에 걸친 집필기간이 담긴 대하소설 ‘토지’의 재출간(마로니에북스)을 앞두고 있다. 문학사상, 지식산업사, 삼성출판사, 솔, 나남을 거치는 과정에서 판본에 생긴 오류나 왜곡을 바로잡는 작업이다. 생김새와 말투가 어머니랑 판박이처럼 닮은 김 이사장은 경기 고양시 일산의 집을 정리하고 남편 김지하 시인(71)과 원주의 아파트에 터를 잡고 산다.

―‘작가 박경리’는 한국 문학의 우뚝한 산맥 같은 존재다. ‘어머니 박경리’는 어떤 분인가.

“글 쓰는 것 말고도 그림과 조각에 능하셨다. 바느질과 요리 솜씨도 뛰어났고 농사도 잘 지으셨다.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가 지어준 옷을 입고 자랐다. 딸을 대등한 관계로 대해주셨다. 문학적 담론에서 철학적 이야기까지 치열하게 토론하고 정신적 대화를 나누는 모녀였다. 결혼 후 온갖 풍파에 부대끼면서 어머니가 대단히 용기 있는 분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좌우 양쪽에서 힘들게 했지만 한 치도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의지가 돼주셨다. 인간으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면 어떤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추호의 주저함도 없던 분이다. 병을 앓아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하듯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생전에 어머니를 오해한 적도 있다. 말년에 날 보면 종종 화를 내시기에 ‘왜 나를 그렇게 미워하지’라고 생각해 스트레스를 받았다. 돌아가시고 나니,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 고생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늘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가슴 아파서 그러셨던 것임을 느꼈다. 누구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고생에 찌든 모습을 보면 화부터 나지 않는가.”

어머니는 6·25전쟁 통에 남편을 잃었다. 피란을 못 떠난 상황에서 인민군의 압박으로 직장에 복귀해야 했던 아버지는 훗날 부역자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매서운 겨울날 어머니는 날마다 옷보따리를 들고 흑석동 집에서 살얼음으로 뒤덮인 임시부교를 건너 서대문까지 걸어서 면회를 다녔다(작가의 남편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딸은 그런 강인함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유신 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핍박받은 김 시인이 숨을 곳을 찾아 어머니를 찾아오면서 둘은 처음 만났다. 연민에서 시작한 사랑은 1973년 결혼으로 이어졌다. 이듬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남편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7년 옥살이 끝에 석방된다. 젊은 아내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남편, 두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모진 세월을 건너왔다.

―결혼하자마자 남들은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는데….

“정권의 박해야 예상했지만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요상한 일이 벌어졌다. 김 시인이 좌우 양편에서 박해를 받은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산 인간을 제물로 바치듯 좌파 일각에서 김 시인을 박정희 정권이 죽이도록 유도해 ‘민족의 제물’로 바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츰 그 상황을 인식한 어머니는 사위를 살리기 위해 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용하게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남편은 어떤 의미에서는 장모 덕분에 살아남았다.”

―같은 편이라고 믿은 사람들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단 말인가.

“좌파의 색채는 여럿이다. 순수한 사람도 많지만 야심가도, 종북주의자도, 간첩도 있다. 돌아보면 민주화 과정에 악(惡)도 기여한 바가 있다. 온갖 세력이 합쳐야 민주화가 가능했다. 민주화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개적으로 남편 속을 들쑤시고 마음에 상처를 줬다. 석방된 이후 20년 동안 12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진 1991년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한 뒤엔 무슨 사회적 발언만 하면 못 잡아먹어 조직적으로 난리를 쳤다. 그 배신감과 원통함이 오죽했겠나.

한데 어느 시점을 넘어서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들에 대한 치열한 미움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최근 주사파 문제가 불거졌듯이 잘못된 문제가 자연스럽게 바로잡힐 때가 오지 싶다. 해외에 나가 보면 두 가지 이유로 대한민국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짧은 시간에 경제성장을 이룬 것과 우리 스스로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것.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불타는 감정들이 가라앉는다. 우리가 고생했어도 보람은 있구나 하고.”

―숱한 절망을 겪고도 앞날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나 병들고, 빛도 못 보고 간 사람 참 많다. 그런 이들을 존중해야 하는데 야심가들이 나서 세상을 오도하고 시끄럽게 만든다. 언제나 혁명 뒤에는 시커먼 야심가들이 있었다. 순수한 사람들이 죽거나 숙청당하면 그 열매를 다른 사람들이 따먹는 식이다. 우리 국민들은 30년 동안 정치적 훈련을 잘 받았다. 선거할 때 보면 귀신같이 선택한다. 균형감각이 뛰어난 것 같다.”

그는 일부 좌파의 이중적 행태를 예로 들며 씁쓸해 했다. 남편을 원수처럼 미워하면서도 큰 행사만 있으면 같은 편인 양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이름을 끼워 넣는다는 것이다.

“세상에선 김지하가 운동권에서 존경받고 대접받으며 지내는 줄 알지만…. 남편은 자기 세월 다 도둑맞은 사람이다. 7년간 감옥에서 외부 접촉 없이 지냈고, 나온 뒤엔 20여 년 동안 변절자, 생명운동 교주라고 공격하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사회생활, 세상에 대한 이해, 가족관계 등 소통이 힘들었다. 신경정신과 약에 취해 멍한 상태로 살다가 지금은 약도 끊고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그래서 더욱 울화통이 치밀어 한다. 사람들 앞에서 감정 조절을 못하고 실수를 한다.”

어느 덧 점심시간. 문화관에 있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집필실에 입주한 10여 명의 작가가 어울려 밥 먹는 모습을 보더니 김 이사장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여기는 문학뿐 아니라 미술 음악 방송 연극 영화 등 여러 장르 예술가들이 어울리는 곳이라 문화적 자극을 받을 수 있다. 국내뿐 아니라 싱가포르, 이란 등 해외 작가도 와 있다. 지금까지 문인 창작실 336명, 예술인 창작실 144명, 해외 레지던스 창작실에 46명이 거쳐 갔다.”

토지문화관은 문화예술위원회, 강원도, 원주시의 도움을 받아 예술인들에게 창작공간을 무료로 지원한다. 최근 개봉한 ‘나는 공무원이다’의 시나리오가 여기서 태어났고, 은희경 씨는 이곳에서 겪은 에피소드들이 신작 ‘태연한 인생’에 담겨 있다고 얘기했다. 다시 시 쓰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송기원 씨는 2년 전 이곳에 머물며 ‘쏟아지는’ 시들을 모아 시집 ‘저녁’을 펴냈다. 1회용 비닐봉투를 여러 번 쓸 만큼 알뜰살뜰 문화관 살림을 꾸려도 해마다 3000만 원씩 적자를 보지만 김 이사장이 씩씩하게 견딜 수 있는 힘이다. 그는 “어머니 돌아가실 때 국상이라 할 정도로 추모열기가 뜨거웠다”며 “지금도 어머니 일이라면 많은 분이 선뜻 나서준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문화관 운영과 함께 작가 박경리를 기리는 사업은 어떤 것이 있나.

“5월 5일 돌아가신 날에 고향 통영에서 기념식이, 10월에는 국내 최초의 세계문학상으로 지난해 제정한 박경리문학상 시상식이 열린다. 국내 문학상이 200여 개 된다더라. 처음엔 상에 부정적이었는데 마음을 바꿨다. 지금은 콘텐츠 시대, 그 중심에 문학이 있다. 세계현대문학의 흐름을 소개하면서 한국 문학을 살리는 기회로 삼고 싶다.”

‘토지’ 5부의 마지막 원고는 1994년 광복절에 완결됐다. 이번 광복절에는 전문연구자들이 참여한 토지편찬위원회가 지금까지 출간된 5가지 판본을 일일이 비교, 대조해 완성한 정본이 처음으로 선보인다. 김 이사장은 새로 나올 ‘토지’에 대한 설렘을 드러내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심이 커져만 간다고 털어놓았다.

“나야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어머니에겐 김지하를 사위로 삼은 일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온갖 마음고생과 역경 속에서 삶도 문학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용기를 지닌 분이셨다. 보통 작가들은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이름이 알려지고 책도 팔리면서 적당히 유명세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엄마는 문단에 발길을 끊었다. 세상을 향해 셔터를 내린 채 글쓰기에만 몰두하셨던 작가적 태도를 존경한다.”

―가장 행복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

“(잠시 생각하더니) 원보랑 세희, 두 아들이 어렸을 때. 고난의 시절이었지만 아이랑 있을 때, 아이들이 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엄마로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사실 아이들만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 너무 불행한 환경이었다. 신경정신과 약을 먹은 아버지가 벽만 짊어지고 있거나 광증을 폭발시키니 형제가 우울증으로 엄청 고생했다. 아이들은 집에 엄마가 없는 시간을 ‘짐승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둘 다 대학을 못 다녔다. 큰아들은 게임 시나리오를 쓰고 있고, 작은아들은 영국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두 아들에게 말한다. 그렇게 힘들게 크게 한 것, 너무 미안하다. 그래도 너희가 이 시간을 극복하면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자산이 될 거라고….”

―그 많은 시련을 겪고도 얼굴이 참 편안해 보인다.

“한때는 평범한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고통의 시간이 셀 수 없이 쌓이다보니까 임계점(臨界點)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더라. 의식이 확장되는 순간이랄까. 지금은 모든 고통이 나를 공부시킨 거라고 받아들인다. 한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원망을 내려놓았다. 김 시인을 만나 내가 성장한 거다. 아마 그런 풍파를 겪지 않았다면 잘난 척하고 얌체처럼 살았을 거다.”

작고 가냘픈 여인을 세상과 당당히 맞서는 ‘씩씩한 장수’로 만들어준 세월. 그 시간은 딸이 어머니의 용기를 온몸으로 체득하는 여정과 포개진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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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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