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경기 안성시의 한 곰 사육장. 기자가 들어서자 곰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바닥으로 철창을 두드렸다. 가슴에 흰 줄이 선명한 반달가슴곰이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철창에 부딪쳐 ‘딱딱’ 소리가 났다. 농장주인 윤모 씨는 “사람이 반가워서 이런다”고 했다. 3.3m²(약 1평) 남짓한 곰 우리는 사방과 천장이 붉은 철창으로 돼 있었다. 방 하나에 한두 마리씩 30여 개의 우리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성인 남성만 한 곰 두 마리가 앞발을 들고 서로의 얼굴을 후려치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올 1월생 새끼 곰은 겁에 질려 눈만 껌벅였다. 넓은 곳에서 혼자 사는 야생의 습성 때문에 곰은 좁은 곳에 오래 있으면 쉽게 예민해진다. 한 4년생 곰은 새끼 때 옆방 곰에게 물려 왼쪽 앞다리가 아예 없다. 그 곰은 자꾸 넘어지는데도 절뚝거리며 우리 안을 빙빙 돌았다. 사육장 앞에서는 목줄에 묶인 누런 개 한 마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 “10년 키운 곰 버릴 수도 없고…”
이곳 곰들은 동남아시아에서 팔려 오던 1981년만 해도 주인의 기대주였다. 당시 정부는 국정홍보영화 ‘대한늬우스’를 통해 “곰의 웅담과 가죽 등은 국내 수요가 많고 수입 대체 효과도 있다”며 농가 소득 증대를 위해 곰을 키우라고 권장했다. 하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윤 씨의 곰 27마리는 오도 가도 못 하는 애물단지가 됐다.
윤 씨가 돈을 벌려면 10년 이상 된 곰을 도축해 웅담을 팔아야 한다. 정부는 야생 곰 평균 수명이 25년임을 고려해 당초 24년이 넘은 곰만 도축을 허락했지만 농가 반발로 2005년 도축 연한을 10년으로 낮췄다.
10년 미만 곰에게서 웅담을 빼거나 도축 곰의 쓸개가 아닌 다른 부위를 팔면 불법이다. 마리당 10g 정도가 나오는 웅담을 얻기 위해 최소 10년을 기르다 보니 한 마리의 웅담 값이 2000만∼3000만 원 선이다. 비싼 데다 동물 복지 논란이 일면서 최근 웅담 수요가 급감했다. 우리 정부가 1993년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가입해 곰을 외국에 팔 수도 없다.
판로가 막히면서 윤 씨는 10년 넘은 곰을 최근 4년간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전체 27마리 중 10년을 넘긴 곰이 20마리다. 사료비로 하루 8만 원씩, 27마리를 키우는 데 매달 240여 만 원이 필요하다. 벼농사 수입을 대부분 쏟아 붓는다. 윤 씨는 “당장 사육장을 없애고 싶지만 살아 있는 곰을 버릴 수도 없고 10년 넘게 키운 정이 있어 굶겨 죽이지도 못한다”고 했다.
국내에서 사육되는 곰은 모두 1000마리. 전국 곰 사육장 50여 곳이 윤 씨와 비슷한 처지다. 수익이 적다 보니 일부에선 산 채로 쓸개즙을 빼내 파는 불법을 저지른다. 시설 투자에도 소홀할 수밖에 없다. 15일 곰 두 마리가 탈출한 경기 용인시의 농장은 철창 문고리가 녹슬어 곰들이 조금만 힘을 줘도 열릴 만큼 노후했다. 같은 종인 지리산 반달가슴곰은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돼 특급 대우를 받지만 이들은 야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돼 웅담 채취용 ‘마루타’로 산다.
○ “대책 안 나오면 곰 풀겠다”
사육 농가들은 정부가 곰 사육을 권장한 책임이 있는 만큼 곰을 모두 사들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부 농가와 동물단체는 “정부가 곰을 수매한 뒤 10년 이상 된 곰은 안락사시키면 300억 원 정도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환경부는 “사육 곰을 매입하려면 사후 관리 및 처리 비용을 포함할 경우 1000억 원가량이 필요해 예산 확보가 쉽지 않다”며 “국가가 곰을 매입해 죽이면 비난 여론이 일 수 있어 안락사시키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곰은 국내 웅담 수요가 살아나면 예전처럼 도축되고, 정부가 농가 요구대로 수매 후 안락사를 결정해도 죽게 될 운명이다. 철창에 갇힌 사형수 신세와 다를 바 없다. 농가들은 마땅한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정부과천청사 앞에 곰 수백 마리를 풀어 놓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관규 강원대 조경학과 교수는 “정부가 국내 곰 테마파크에 비용을 일부 대 주며 20∼30마리씩 맡기거나 수의대 학술림에 보내 연구용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안성=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신무경 인턴기자 고려대 철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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