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로망 올레길 ‘살인의 추억’에 짓밟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23일 03시 00분


■ 40대女 실종 제주 올레1길 가보니…

홀로 걷고 싶었다. 15년 동안 함께한 애견이 지난해 숨진 후 허탈감이 심했다. 미혼 여성 강모 씨(40·여·서울 노원구)는 마음을 달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해 ‘올레’를 택했다. 치유와 사색의 길로는 최고라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뒤져 올레 1코스 주변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강 씨는 11일 오전 제주에 도착해 시외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노란색의 아담한 게스트하우스는 마음에 들었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올레를 걷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여성 10여 명이 있었고 무엇보다 홀로 걸어도 괜찮을 것으로 여겼다. 12일 오전 게스트하우스에서 마련한 토스트와 계란을 아침식사로 말끔히 비우고 7시 반경 길을 나섰다.

하지만 이것으로 강 씨의 행방은 사라졌다. 그리고 8일 후 운동화와 잘린 손목만이 발견됐다.

강 씨는 어디서 어떻게 납치된 것일까. 기자는 22일 오전 7시반 경 강 씨가 걸었을 길을 따라가 봤다. 강 씨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제주올레 1코스 입구인 시흥초등교 주변에 있다. 입구를 출발해 10여 분을 걸어 작은 화산체인 말미오름(해발 146m) 입구에 닿는 동안 다른 탐방객은 보이지 않았다. 오름입구 올레안내소에는 그 흔한 폐쇄회로(CC)TV도 없었다.

말미오름에 오르는 길은 숲이 우거졌다. 강 씨가 실종된 당일에 안개가 심했던 것과 달리 이날은 맑았는데도 소나무, 삼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곳은 햇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조용하고 어두침침했다. 숲을 지나자 억새가 어깨높이만큼 자란 언덕이 나왔다. 길을 벗어나면 헤어 나오기 힘들 정도로 우거졌다. 말미오름 정상까지 30분가량 걸렸다. 강 씨가 마지막으로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접속한 시간이 12일 오전 8시 12분. 말미오름에 올랐다면 정상에 있었을 시간이다.

말미오름까지의 길은 대부분 평이했다. 하지만 평소 운치를 전해줬을 법한 울창한 나무와 억새는 범죄의 은폐물로만 보였다. 올레 안내소는 강 씨 실종 당일(목요일) 정기 휴무라 근무 직원도 없었다.

○ 홀로 걷는 올레 이미지 타격

이번 사건으로 ‘홀로 걸어도 안전한 올레’라는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07년 9월 올레 1코스가 개장한 이후 올레는 국내 도보여행의 대명사로 떠오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08년 3만 명에 불과했던 올레 탐방객이 지난해 109만 명에 이를 정도로 제주 생태와 도보여행의 대표로 떠올랐다. 개장 초기 여성이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이 같은 인기는 제주 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한 재발견과 함께, 혼자서 걸을 수 있다는 여성의 ‘로망’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수시로 찾는다는 박모 씨(48·여·경기 고양시)는 “아이와 남편이 힘들게 할 때마다 푸근하게 안아줄 것 같은 올레는 친구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솔길이 많은 올레 코스의 특성상 범죄를 예고하고 있었다는 지적도 많다. 주변 경관이 노출된 해안가 올레 코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곶자왈(용암이 흐른 요철지대에 형성된 자연림), 오름 등지는 숲이 울창해 범죄가 일어나도 인근에서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다. 올레 11코스, 14-1코스 등에서는 휴대전화 연결이 어려운 구간도 있다. 이 때문에 제주올레 홈페이지에는 범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아 왔다. 제주올레 관계자는 “그동안 경찰에 요청해 순찰활동을 실시했는데 결코 생겨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며 “이제는 혼자보다 동반자와 함께 올레 코스를 걷도록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 진전 없는 경찰 수사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시외버스정류소에서 20일 발견된 흙 묻은 운동화, 손목 부분에서 잘린 오른손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지문 대조와 유전자 감식 결과 22일 강 씨의 것으로 판명 났다. 운동화가 발견된 곳은 강 씨의 휴대전화 마지막 접속이 끊긴 지역에서 18km가량 떨어진 곳이다. 경찰은 헬기를 이용한 공중수색을 비롯해 특공대, 지역주민 등을 투입해 올레 1코스 주변을 수색하고 올레 코스와 버스정류소 부근 CCTV를 확보해 분석 작업을 벌이고 있다.

경찰은 강 씨의 이성문제, 금전관계 등을 확인했지만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개인적인 원한 여부도 조사했지만 뚜렷하게 드러난 점이 없다”며 “현재로서는 사이코패스(겉은 멀쩡하면서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자)의 엽기행각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 올레 ::

큰 길에서 집 앞까지 이어진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방언으로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2007년 9월 올레 1코스를 개장한 이후 도보여행 길을 의미하는 단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제주올레 코스는 올해 9월 제주해녀박물관에서 성산읍 시흥초등교까지 21코스를 개장하면 정규 21개 코스, 비정규(섬 및 산간) 5개 코스를 합쳐 모두 26개 코스, 430km에 이르는 길을 완성한다.

[채널A 영상] 제주 실종 여성 관광객 신체 일부 운동화에 담긴 채 발견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올레#실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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