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8시 반경 경기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의 한 전원주택으로 50, 60대 주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일부는 승합차를 타고 왔고 개인 승용차나 택시도 대절해서 타고 왔다. 30여 명이 모이자 죽 둘러앉아 화투 패를 돌렸다. 수년 전부터 도박판에서 알고 지낸 이들은 ‘하우스장’ 이모 씨(61·여)가 마련한 이 집에서 지난달부터 가끔 모였다. 이 씨는 집 주인에게 임차료 조로 하루 30만 원을 줬다.
도박 종류는 속칭 ‘도리짓고땡’이었다. 하우스장인 ‘오야’가 화투 20장을 5장씩 네 패로 나눠 돌리고 참가자들은 마음에 드는 패에 돈을 걸어 오야와 승부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각자 도박 자금은 수십만 원에서 100만 원 정도였다.
분위기가 무르익던 10시 14분 박모 씨(69·여)가 “몸이 좋지 않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박 씨는 전원주택을 나와 큰길 쪽으로 가다 순찰차가 다가오는 것을 봤다. ‘단속이 떴다’고 생각한 박 씨는 곧장 휴대전화로 도박장에 있던 다른 박모 씨(64·여)에게 “백차가 간다”고 귀띔해줬다. 이것이 비극의 발단이었다.
전화를 받은 박 씨가 “경찰이 온다”고 소리쳤고, 도박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들은 돈과 옷가지만 들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집 뒤편으로 통하는 주방과 베란다 창문으로 몰려들었다. 하우스장 이 씨는 어른 가슴 높이의 주방 창문으로 나가려다 몸이 창문을 반 정도 넘는 순간 기우뚱하면서 떨어져 목뼈가 골절됐다. 창문으로 빠져나온 이들은 어둠 속에서 높이도 따져보지 않고 철제 난간을 넘어 옹벽에서 뛰어내렸다. 옹벽의 높이는 4.6m. 이들은 뒤틀린 허리와 부러진 다리를 잡고 아우성을 쳐댔다. 백모 씨(64·여)는 뛰어내리다 높이가 6.1m나 되는 시멘트 맨홀로 떨어져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난리가 벌어졌는데도 경찰은 도박장으로 들이치지 않았다. 순찰차는 전원주택에서 600m가량 떨어진 아랫마을에 출동하던 중이었다. ‘술을 먹고 소란을 피운다’는 신고 때문이었다.
경찰이 오지 않으면서 소동은 마무리됐지만 이미 아수라장이 된 뒤였다.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하우스장 이 씨는 중상을 입었고 옹벽에서 뛰어내린 10여 명도 크고 작은 골절상을 당했다. 숨진 백 씨는 다음 날 0시 58분에야 시신이 발견됐다. 심하게 다친 4명은 병원으로 실려 갔고 이 중 3명은 수술까지 받았다. 허리 수술을 받은 한 여성은 경찰에 적발될까봐 수술 하루 만에 퇴원해 잠적했다.
시신 처리 문제로 고심하던 이들은 도박 사실을 숨기기 위해 도박 전과가 없는 3명을 시켜 거짓으로 경찰에 자수하도록 했다. 이들은 경찰에서 “저녁 먹고 놀이 삼아 고스톱을 쳤는데 담배 피우러 나간 백 씨가 돌아오지 않아 찾아보니 숨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거짓말은 금세 들통 났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화투를 쳤다는 말을 의심한 경찰이 추궁하자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모든 걸 자백했다. 경찰 조사 결과 하우스장인 이 씨는 경기 성남 광주 등지에서 도박장을 열어 왔으며, 문방(망보는 사람) 찍새(도박범) 박카스(음료수 판매자) 등으로 역할을 줘 도박판을 벌여 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기 광주경찰서는 사고 당일 도박판에 있던 28명의 신원을 확인해 입건했으며, 이 씨 등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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