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저 남편이 사고를 낸 줄만 알았다. 현장 검증이 이뤄진 날에야 남편이 열 살짜리 여자 아이를 살해한 사실을 알았다. 남편이 성범죄 전과가 있다는 사실도 그때야 처음 알게 됐다. 여전히 한국말이 서툰 그녀에게 그날 함께 있던 베트남 친구들이 알려 준 것이다. 국제결혼을 한 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와 2년 가까이 살았지만 그 누구도 남편이 성범죄 전과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고 한아름 양(10) 납치 살해 사건 피의자인 김점덕(45)의 아내 A 씨(22)의 기구한 사연이다.
국제결혼의 제도적 허점으로 인해 남편의 전과 사실을 모른 채 결혼했다가 뒤늦게 고통 받는 이주 여성이 적지 않다.
통영 사건 피의자 김점덕은 2005년 개울가에서 이웃 동네 60대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반항하자 돌로 내리쳐 다치게 한 혐의로 4년간 복역하고 2009년 5월 출소했다. 그리고 불과 몇 개월 뒤 성범죄 전과를 숨긴 채 국제결혼중개업체의 중매로 베트남 출신 A 씨와 결혼했다.
또 다른 결혼 이주 여성 B 씨는 결혼 뒤에야 우연히 남편이 강도, 강간 미수로 집행유예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B 씨는 현재 남편과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다. 외국인주민지원센터 등에 따르면 자신의 직업을 선생님이라고 밝혔던 남편이 사실은 도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경우도 있었다.
한국인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국제결혼으로 결혼 이주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90년대부터다. 2000년대 중반에는 농촌 총각의 40% 이상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할 정도로 국제결혼이 증가했다. 하지만 정부는 2010년 5월에야 ‘결혼중개업의 관리에 관한 법률’에 ‘중개업자는 범죄경력조회서를 받아 서면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우옥분 대구이주여성인권상담소장은 3일 “2011년 이전까지는 해당 남성이 정신적·경제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얼마든지 국제결혼을 할 수 있었다”며 “주변에서는 그 남편의 전과에 대해 알고 있더라도 쉬쉬하기 때문에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하나둘씩 그런 사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결혼 이주 여성 상담소 관계자는 “법 개정 이후에도 범죄경력조회서 제공이 사실상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며 “국제결혼중개업체에서 서류를 허위로 조작해 전달했더라도 사실상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귀띔했다.
정부는 올 2월 관련법에 ‘해당 국가의 언어로 번역해 해당 국가 공증인의 인증을 받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넣었다. 이 규정은 2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개정 법률도 실효성 논란이 있다. 실제로 최근 기자가 성범죄자를 가장해 한 국제결혼중개업체에 “내가 성범죄 전과가 있는데 신부 측에 알리지 않고 국제결혼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 방법을 찾아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자가 망설이자 일단 “우리 회사를 믿고 한번 시도라도 해보자”고 설득했다.
또 다른 국제결혼중개업체는 “일단 임신을 시킨 뒤 결혼 절차를 밟는 것도 쉽게 국제결혼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대사관에서도 아내가 임신했을 경우에는 남편이 성범죄나 전과가 있더라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비자를 발급해 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결혼 이주 예정 여성이 남편의 범죄 경력 등을 제대로 인지했는지에 대해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빠져 있다는 점도 개정 법률의 문제점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관계자는 “보험 가입 시 가입자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계약 사항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인지했다는 사실을 녹음하거나 본인의 사인을 받는 것과 같은 절차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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