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 경로당. 부녀회장이 경로당에 들어서며 던진 말 한마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문을 일으킨다. 경로당에 한 대밖에 없는 유선전화 요금이 무려 279만 원이라는 사실을 전한 것. 게다가 누군가 밤늦게 경로당에서 성인폰팅을 하느라 전화요금이 많이 나왔다는 말을 들은 어르신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술렁였다. 범인은 누구일까.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동 종로노인종합복지관 2층 회의실에선 백발의 어르신들이 모여 대본 연습 중이었다. 경로당 전화요금을 둘러싼 한바탕 소동을 다룬 연극 ‘경로당 폰팅사건’ 공연을 앞두고 어르신 연극 동아리 극단 빨래터 회원 13명과 이번 연극의 연출을 맡은 강영걸 씨(69)는 이날 두 번째 수정을 갓 마친 대본을 읽으며 대사를 맞춰 봤다. 강 씨는 관객 20만 명을 동원한 ‘불 좀 꺼주세요’를 연출하며 1990년대 연극계를 주름 잡았다. 삼성문예상, 백상예술대상, 서울연극제 희곡상 등을 휩쓸었던 그가 동네 어르신들의 연극 연출을 맡기로 한 건 노년의 삶을 진지하게 채워 나가는 단원들에게 사명감과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다.
사단법인 소극장협회는 종로구와 함께 지난해부터 대학로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대학로소극장 축제를 열어 왔다. 협회 측은 이달 말 개최되는 축제에서 두 번째 연극을 선보이는 어르신 극단의 전문적 지도를 위해 강 씨에게 연출을 부탁했다. 강 씨는 “학예회 수준에 머무는 연극이 아니라 이분들이 살면서 제대로 된 연극을 맛보고 갈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에 연출을 맡기로 했다”며 “완벽한 연기는 선보이지 못하더라도 주말도 반납하고 연습하는 이분들의 진정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씨는 어르신들의 연기력을 고려해 배역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손수 극본을 각색했다.
최근 노인 전용 영화관으로 자리 잡았던 서대문구 청춘극장이 서대문아트홀 폐관과 함께 사라지며 은평구 연신내 메가박스의 단관을 빌려 이름만 유지하게 될 정도로 노인 문화가 소외받고 있지만 어르신 단원들은 꿋꿋이 자신들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단원 안영자 씨(71·여)는 “지난해 남편과 사별하며 큰 아픔을 겪었지만 연극과 함께 마음을 달래며 다른 행복을 찾게 됐다”며 “연극을 통해 우리 세대의 경험을 젊은 세대와 나눌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경로당 폰팅사건의 범인이 궁금하다면 28, 29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소극장 시월을 찾으면 된다. 공연비는 무료지만 후원금을 모아 연극 꿈나무를 위해 쓸 계획이다. 문의 02-741-4188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