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후 9시 제주시 도두동 앞바다. 10여 척의 어선이 집어등에 불을 밝힌 채 한치잡이에 한창이다. 덕진호(3.5t) 오문호 선장(57)은 배 앞머리에 설치한 5개의 낚싯줄을 번갈아가며 끌어올리느라 숨 돌릴 틈이 없다. 오 선장은 “불빛을 보고 몰려드는 한치를 인조 미끼로 잡아 올린다”며 “한치는 6월부터 잡히기 시작해 8월 중순이 가장 많이 잡히는 제철”이라고 말했다. 전에는 9월 말쯤 한치 조업이 끝났는데 요즘은 수온이 올라서 그런지 11월에도 잡힌다고 한다.
○ 오징어보다 고급
한치가 쌀밥이라면 오징어는 보리밥이고, 한치가 인절미라면 오징어는 개떡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 수 위’ 대접을 받는다. 오징어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한치는 대형 꼴뚜기에 가깝다. 같은 연체동물로 살오징어목에 속하지만 오징어는 살오징엇과, 한치는 꼴뚜깃과로 분류된다. 눈에 막이 있으면 한치, 막이 없으면 오징어로 판별한다. 오징어와 달리 다리가 한 자(30.3cm)의 10분의 1인 ‘한 치(약 3cm)’에 불과해 한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시대 해양생물을 집대성한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오징어와 꼴뚜기를 ‘종잇장처럼 얇은 뼈를 가지고 있는 귀중한 고기’라는 뜻의 ‘고록어(高祿魚)’로 표현했다.
한치는 봄철 자리돔, 겨울철 방어와 더불어 제주지역 여름철 대표 수산물이지만 대중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다. 1980년대 이전에는 오동나무나 대나무를 이용해 만든 낚시에 문어 방어 놀래기 등을 미끼로 썼다. 어획량이 적고 산 채로 옮길 방법도 마땅치 않아 대부분 자가소비에 그쳤다. 1980년대 중반 성산포수협을 중심으로 오징어 채낚기가 본격화되면서 한치잡이도 덩달아 성행했다. 1980년대 후반 야밤에 해상에서 불을 밝혀 어류를 모으는 집어등 시설이 도입되면서 한치 어획량도 많아져 본격적으로 횟집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 제주에선 여름 별미
한치 요리는 회와 물회가 주종이다. 비빔밥 김밥 주물럭에도 이용된다. 회는 한 접시(600g내외·보통 3마리)에 3만 원 내외다. 겉으로 보기에 길게 썬 하얀 무처럼 보이며, 씹을수록 담백한 맛이 우러난다. 귀로 불리는 삼각지느러미, 몸통과 다리를 연결하는 부분은 오돌오돌 씹히는 맛이 좋다. 쌈장을 찍은 회를 상추나 깻잎에 싸 한입 가득 넣으면 상큼하면서도 쫄깃한 느낌이 한꺼번에 전해진다.
물회는 물에 된장을 풀고 채소들을 섞어서 먹었던 제주전래 음식 ‘자리물회’ 방식으로 만든다. 자리돔 대신 한치를 회로 넣은 것이다. 깻잎 부추 양파 오이 등을 송송 썰어 된장 고추장 식초 참기름를 넣어 만든다. 다른 지역에선 초고추장이 주요 양념이지만 제주에서는 된장을 넣는다. 비린내를 없애고 구수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 기호에 따라 자리물회에 초피나무(제피나무) 잎을 넣으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물회 가격은 1인당 1만 원 선. 냉동 한치를 쓰면 8000원 내외로 식당에 따라 가격차가 난다.
한치잡이를 제주에서는 ‘낚는다’고 하지 않고 ‘붙인다’고 표현한다. 수십 m에 이르는 줄에 묶인 미끼를 한치가 삼키는 것이 아니라 다리로 미끼에 달라붙기 때문이다. 묵직한 느낌이 들면 서서히 낚시 줄을 당겨 올리면 된다. 해면으로 올라올 때 한치는 먹물을 뿌리며 달아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제주 근해에서 잡히는 한치는 길이 15∼40cm로 난류를 타고 이동한다. 여름철 수온이 낮으면 어획량이 줄어든다. 제주시 이호항 등에서는 1인당 2만∼3만 원을 내면 직접 한치잡이를 경험할 수 있다. 제주도 조동근 어선어업담당은 “내장과 비늘을 벗겨 냉동 보관했다가 해동해도 활(活) 한치와 비슷한 맛을 내기 때문에 사철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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