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기록의 마법에 빠졌다, 모든게 풀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25일 03시 00분


社史 작가와 ‘뺑반장’의 기록 예찬

멀티비츠·내셔널지오그래픽
멀티비츠·내셔널지오그래픽
대구의 중소 철강업체인 태창철강은 2001년까지만 해도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당시 창립 55년을 맞이하는 탄탄한 기업이었지만 지역 명문대 졸업생들이 선호하는 직장은 아니었다. 지방의 중소기업이라는 이미지 탓이 컸다. 그러나 몇 년 뒤, 상황이 반전됐다. 경북대 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지방기업에 당당히 꼽힌 것이다. 이후 이 업체에는 서울의 대졸자들도 취업을 하러 내려오게 됐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바뀐 것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2002년 펴낸 사사(社史), ‘TC스타일’ 덕이라는 사람이 많다. 창립 55주년 기념으로 전문작가 유귀훈 씨(56)가 작성한 이 사사는 200쪽이 좀 넘는 자그마한 책이다. 태창철강은 이 책을 경북대를 비롯한 대구의 주요 대학에 깔았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자 회사의 인재 구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유 씨는 “태창철강 회장님이 저한테 ‘회사 창립 이래 어떤 임원보다도 공헌을 많이 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기록 하나가 마법을 부린 것이다.

○ ‘메모는 기록이 아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의 기록만 충실히 돼 있어도 좋았을 텐데요….”

2001년 겨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의 한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숨진 사람들의 죽음이 과거 권위주의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것인지를 조사하기 위해 의문사위가 출범한 지 1년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당시 의문사위에 조사를 해달라고 유가족들이 진정한 사건은 모두 83건이었다.

그러나 이 중 11건만이 공권력에 의한 사망으로 판명됐다. 나머지는 공권력이 개입되지 않았거나 사인(死因)을 밝히기 어렵다고 결론지어졌다. 그 위원이 말한 취지는 만약 사건 발생 초기에 경찰이나 군 헌병대가 정확한 기록을 남겨 사인을 분명히 했더라면 유족들이 10∼20년이 지나도록 애간장을 태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기록은 중요하다. 사전적으로 기록은 뒷날까지 보존하기 위해 어떤 사실을 적어둔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 씨는 단지 적어두는 것만으로는 기록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유 씨는 1990년 노루표페인트를 시작으로

22년째 기업의 역사를 기업의 평전(評傳)처럼 쓰고 있는 사사 전문작가다. 삼성전자, 종근당, 현대자동차, 삼성SDI, 포스코 같은 유수 기업 20여 개의 사사를 집필했다.

2009년까지 그는 1년에 한 회사의 사사만 쓰기를 고집했다. 그런데 매번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업체에 찾아가서 그동안의 기록이 있느냐고 물으면 담당자는 언제나 그렇다고 답했다. 보여 달라고 하면 사무실 캐비닛이나 창고에 있는 커다란 박스들을 가리켰다. ‘영업부’ ‘생산부’ 같은 부 이름이 적혀 있는 박스들 안에는 그때까지 각 부에서 생산해낸 각종 보고서 등이 가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냥 모아둔 것들에 불과했어요. 그걸 기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요.”

그것들은 기록이 아니라 말하자면 회사와 관련된 날것의 자료나 메모를 수집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보관된 자료일 뿐이었다. 회사의 기억에 관한 파편 뭉치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쌓아놓는 것이 관행적인 사사 집필방법이었다. 유 씨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메모가 구슬이라면 기록은 그걸 꿰어내 보배로 만드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는 계속 낱개의 구슬만을 모아놓고 그걸 기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기록의 시작은 바로 흥미와 열정이라고 유 씨는 말한다. 메모가 이리저리 쌓이기만 하는 것은 기록하는 사람이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지 관심도 열정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 관심, 흥미와 열정을 기반으로 메모를 꿰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 기록자의 생각이 담겨야 기록

1999년 경북 구미경찰서 교통사고조사계에는 ‘뺑반장’이라 불린 50대 중반의 조사반장이 있었다. 뺑반장은 뺑소니 사건 전담반장이라는 뜻도 있었지만 그가 맡은 뺑소니 사건은 어떻게든 해결하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기도 했다.
▼ 뺑소니 전문수사 ‘뺑반장’ 무기는 카센터 25년간 분석한 수첩들 ▼

그해 상반기 관할 구역에서 발생한 뺑소니 사건 6건의 피의자도 모두 그가 붙잡았다. 수사비법은 다름 아니라 그가 25년간 기록해온 수첩들에 있었다.

손바닥만 한 수첩들은 세워서 포개 놓으면 책상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을 채울 정도의 분량이었다. 수첩에는 구미를 비롯해 대구 경북의 크고 작은 카센터들에 관한 내용이 깨알 같은 글자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무허가 카센터까지 빼놓지 않았다. 뺑반장은 각 카센터 항목마다 사장이 누구인지, 실제 소유주인지 아니면 이른바 바지사장인지, 종업원은 누구며 특장이 있는 보유 기술은 무엇인지, 이 카센터에서 잘 고치는 분야는 무엇인지 등을 기록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뺑반장이 6개월마다 이 카센터들에 대한 변경사항이 무엇인지를 직접 방문하든지, 아니면 전화를 걸든지 해서 꼭 기록해 놓는다는 것이었다. 뺑소니범을 잘 잡는 것은 당연했다.

컨설팅 전문업체 모니터그룹의 고중선 이사(40)는 “기록에는 ‘팩트’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까지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받아쓰기나 기계적으로 적는 것은 기록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뺑반장은 단지 카센터에 관한 사실만을 적은 것이 아니었다. 뺑소니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 사실들을 분류하고 종합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의 조각들을 나름의 체계로 묶어냈다.

고 이사는 2006년부터 1년에 한 권 정도 200쪽 남짓의 손바닥 크기 수첩을 기록하는 데 쓰고 있다. 업무에 필요한 주요 보고서나 논문을 읽고 나서 다만 한두 줄이라도 자신의 생각으로 정리하고 요약을 해놓기 위해서다. 스스로 정리하고 표현하는 것은 그냥 눈으로 자료를 보는 것과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고 이사는 “(기록에는) 내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요약을 해서 핵심을 파악하려는 의도적인 노력들이 개입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유 씨가 태창철강의 사사 ‘TC스타일’을 집필할 때도 바로 이런 기법을 사용했다. 기존의 사사는 날것의 자료로 넘쳐났다. 관련된 모든 걸 다 놓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유 씨가 어느 정부기관에서 기록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해당 기관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보고 “이걸 다 읽어본 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참석자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다. 유 씨는 “기록 작가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료뭉치들 중에서 쳐낼 건 쳐내야 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면 중요하지 않은 건 무시해버려야지요”라고 말했다. 유 씨는 그렇게 태창철강의 ‘TC스타일’을 구성해냈다. 그럼 이제 기록은 완성될 것일까? 아니다.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았다.

○ 공유할 것인가, 보고할 것인가

허동현 경희대 교수(역사학)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한 언론에 실었다.

“1871년 11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전권대사로 한 일본의 구미(歐美) 사절단이 요코하마에서 출항했다. 그를 위시해 메이지 유신 정부의 관리와 유학생 등 100여 명은 1872년 9월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을 돌며 선진국의 문물과 제도를 둘러봤다. 사절단이 1년 10개월간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이후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라는 5권의 책으로 편찬돼 뜻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읽어볼 수 있었다.

10년 뒤인 1881년 조선도 조사시찰단을 꾸려 3개월간 구미 여러 선진국을 돌고 귀국했다. 이들은 시찰의 성과를 담은 보고서 80여 권을 작성했다. 서예에 능한 아전들이 두 달에 걸쳐 기록해 비단 표지를 입힌 이 책들은 고종에게 바쳐졌다. 국왕과 일부 위정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책을 보지 못했다.”

이 사례는 기록을 작성할 때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바로 독자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기록의 독자는 국민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권력핵심층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 차이가 19세기말∼20세기 초 두 국가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기존의 사사는 대부분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기관장을 최종 독자로 상정하고 만들어졌다. 기업이나 기관 내부용 기록인 셈이다. 그 밖의 독자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내부 각 부서는 자신들의 기록이 배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기록자는 이들의 눈치를 보다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놓치고 만다. 두께가 목침만큼 굵어져도 CEO를 비롯한 임원들의 체면은 세웠다고 생각한다.

유 씨는 태창철강의 CEO를 최종 독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작지만 장수하는 기업이 긴 역사 속에서 갈고닦은 경험과 지식이 무엇인지를 회사 밖에 알리고자 했다. 태창철강만이 가지고 있는 암묵지(暗默知·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식)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려고 했다. 그리고 이 기업의 미래가 어떨지를 전망하고자 했다. ‘TC스타일’은 회사 밖의 많은 대학생과 만나 기업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2007년 일본 최대 철강업체인 신일본제철은 직원 가운데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 세대 숙련공들에게 휴대용 개인정보기기(PDA)를 지급하고 그들이 현장에서 쓰는 헬멧에는 소형 마이크 같은 음성인식장치를 부착했다. 정년퇴직이 다가오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경험과 지식, 즉 그들만의 암묵지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통해 현장의 개인적 경험과 지식을 조직의 경험과 지식으로 공유하려 했다.

기록은 공유하는 것이다. 기록은 보고로 끝나서는 안 된다. 유 씨는 공유되는 기록이 그 조직, 사회, 나아가 국가를 더 번영되고 안정되게 만든다고 믿는다.

○ 기록혁명이 필요하다

‘기록작가’ 유 씨가 생각하는 한국의 기록문화 수준은 3류다. 정부와 사회, 그리고 개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기록은 그저 날것의 자료를 한데 모으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믿음이다.

지난 20여 년, 그가 사사 집필을 위해 만난 일본인들은 언제나 그를 만날 때 수첩과 각종 자료를 가방에 가득 담고 나왔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보면서 정확한 답을 해줬다. 반면 그보다 100배는 더 많이 만난 한국인들은 단 한 명도 어떠한 기록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일본의 과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가 쓴 ‘16세기 문화혁명’(남윤호 역·동아시아·2010년)에는 17세기 유럽 과학혁명의 토대가 16세기 수공업 직인들의 문화혁명이라고 분석했다. 직인들이 일으킨 문화혁명은 어떻게 보면 간단했다. 자신의 분야에서 대대로 내려온 경험과 지식을 당대 지식인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각 지역(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의 속어(俗語)로 기록해 책으로 만들어 공유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들과 같은 ‘기록혁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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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뺑반장#뺑소니 전문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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