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서울 은평구 진관동 상림마을 롯데캐슬 아파트 1단지. 주민들의 커뮤니티센터인 ‘캐슬문고’에서 동네 주민과 어린이 5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영어품앗이 시연회가 열렸다. 공룡탈을 쓴 엄마들이 이웃집 아이들 앞에서 서툰 율동과 영어노래로 아이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었다. 주부 김신혜 씨는 “아이와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네 봉사활동에 나서고 이웃 사람들도 친해지게 됐다”며 만족해했다.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도 누군지 모르는 삭막한 도시 아파트문화가 바뀌고 있다. 이웃간의 벽을 허물면서 살맛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아파트가 점차 늘고 있는 것.
○ 사랑이 꽃피는 공동체
11개동 707채 규모의 롯데캐슬 아파트는 일반분양과 장기임대주택이 절반씩인 단지. 2008년 입주 이후 주민 사이에 갈등도 많았지만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해 나갔다. 마을문고 운영회를 중심으로 ‘다행(다같이 행복한) 마을 만들기’ 사업을 펼치고 방과후 수학교실과 외국어 강좌 등 평생공부방 운영, 요가 미술 다도 등 문화체험강좌, 아파트 주민소식지 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강서구 화곡푸르지오 아파트도 활발한 커뮤니티 활동이 펼쳐지는 곳. 이곳 주민들은 2176채 대단지로 인적자원이 풍부하다는 점을 활용해 재능기부를 활성화하고 있다. 주민들이 각자의 전문영역을 살려 강사로 나서 무용 연극 라인댄스 합창 기타 등 26개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성동구 금호롯데 아파트에서는 매달 넷째 주 토요일 오후 8시 반에 안내방송에 따라 함께 카운트다운을 하며 모든 집이 15분 동안 일제히 불을 끄는 이색적인 풍경이 빚어진다. 주민들이 양초를 만들어 나눠주고 청소년봉사단이 단지를 돌며 홍보하면서 함께 행사를 준비한다. 여주영 서울시 공동주택 커뮤니티전문가는 “함께 힘을 합쳐 에너지를 절감했다는 성취감을 공유하면서 주민들이 친밀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시도 ‘공동주택 커뮤니티 활성화 사업’을 통해 지원에 나섰다. 시는 지역 내 자원봉사자나 사회복지사 등을 대상으로 29명의 커뮤니티 플래너를 양성해 각 자치구 내 아파트에 파견했다. 플래너들은 아파트의 특성을 파악하고 단지에 맞게 친환경, 문화강좌, 봉사활동, 건강, 육아 및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돕고 있다.
○ “눈에 보이는 성과가 중요”
지금은 친밀해보이지만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도봉구에서 활동하는 한 공동주택 커뮤니티 전문가는 “입주자대표회의와 공동체조직단체, 주민들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며 “봉사단 회원들만 열심히 활동하고 일반주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상림마을1단지 아파트 주민들도 지금 수준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2년이 넘게 걸렸다. 처음에는 주민들끼리 갈등이 심해 동마다 있는 커뮤니티 시설을 다른 동 주민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기도 했다. 하지만 뜻있는 사람들이 2009년 ‘마을의 자존감을 높이자’며 마을문고와 독서실을 열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 처음에는 관심 있는 몇몇 주민의 동아리 수준에 그쳤지만 획기적인 대책이 제시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최옥경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주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아파트 관리비 부담이 줄어드는 등 공동체 활동의 성과를 체감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문고운영위원회와 입주자대표회의는 사전감사제, 부녀회 운영회 자생단체 등의 지출창구일원화 등으로 비용을 절감하고 독서실 운영수입을 활용해 주민들에게 1년간 5000만 원의 관리비를 돌려줬다. 주민소식지를 통해 커뮤니티 활동을 알리고 관리비 부과 내용을 공개했다.
관리비가 줄어들자 주민 호응이 높아지고 공동체 활동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점점 참여가 확산되면서 부모 커뮤니티, 순수봉사팀, 재능기부팀 등이 속속 만들어졌다. 문고는 현재 매일 주민 20∼30명, 한 달에 600여 명이 다녀가는 사랑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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