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코앞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태풍이 열흘만 늦게 왔어도 내다 팔 수 있었는데….”
28일 오후 전남 나주시 왕곡면 양지마을. 태풍 볼라벤이 휩쓸고 간 배 과수원은 쑥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바닥에는 누렇게 익은 배들이 널려 있었고 꺾인 나뭇가지는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었다. 권순철 씨(54)는 널브러진 배를 보며 망연자실했다. 권 씨는 자정부터 바람이 심상치 않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3시가 넘어서면서 창문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극심한 봄 가뭄을 이겨내며 애지중지 키워온 배는 초속 30m가 넘는 강풍에 속절없이 떨어져 나갔다.
권 씨는 “20년 넘게 배 농사를 지어 왔지만 이번처럼 낙과 피해가 큰 적은 없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2만9752m²(약 9000평)의 과수원에서 10일 후면 출하할 수 있는 신고배가 80%가량 떨어졌다. 권 씨는 “가지에 남아 있는 것은 크기가 작거나 꼭지가 비틀어져 상품성이 없을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권 씨는 “올 농사는 어쩔 수 없지만 당장 내년 농사가 걱정”이라고 했다. 가지가 찢기고 잎사귀가 떨어져 내년 봄에 배꽃이 피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남 나주배원예농협은 나주지역 과수원 2391ha에서 70∼80%의 낙과 피해를 본 것으로 보고 있다. 나주배가 전국 생산량의 20%를 차지하고 한 해 매출액이 1500억 원에 달한 것을 감안하면 피해액만도 12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됐다. 조준식 나주배원예농협 상무(52)는 “이번 태풍은 28일 새벽부터 오후까지 10시간 넘게 지속돼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졌다”고 말했다.
태풍 볼라벤은 바다 양식장도 집어삼켰다. 이날 새벽 순간 최대풍속이 초속 51.8m에 달한 전남 완도에서는 해상 전복양식장이 강풍과 파도에 떠밀려 완파됐다. 완도군 완도읍 망남리 앞 600m 해상에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설치한 35ha의 가두리 양식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해안은 온통 엉키고 부서진 어구들로 뒤덮였다. 가두리 양식장은 밧줄로 단단히 고정돼 있었지만 태풍의 위력에 맥없이 끊어져 버렸다. 주민들은 부둣가에 나와 부서진 양식장을 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최성환 망남리 어촌계장(53)은 “3년 이상 키운 전복 1만 개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며 “부서진 양식장 더미에 살아 있는 전복이 있을까 뒤져 봤지만 헛수고였다”고 말했다. 8년 전부터 전복 양식을 해온 정병복 씨(50)는 “지난해 무이파 태풍 때도 끄떡없이 버텼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완도군에서는 지난해 국내 전복 생산량 9224t의 80%인 7400t을 생산해 5000억 원대의 매출을 올렸다. 이곳에는 전복뿐 아니라 넙치, 돔 등 어류 양식장도 몰려 있다. 완도군은 이날 오후 해상 가두리 양식장 주변의 거센 풍랑과 강풍으로 인해 현장 접근이 어려워 정확한 피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안환옥 완도군 홍보팀장은 “현장 확인이 불가능해 구체적인 피해 규모를 파악하려면 이틀 정도 지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완도=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나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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