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나흘 앞둔 26일 오후 전남 나주시 봉황면 용전마을. 배 주산지인 이 마을에서는 한가위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3주 사이에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3개가 모두 이곳을 강타하면서 과수원이 쑥대밭이 된 것이다. 과수원에 들어서자 바닥에 시커멓게 멍이 들고 썩은 물이 흐르는 배가 널려 있다. 태풍이 휩쓸고 간 지 열흘가량 지났지만 상흔은 여전히 농심(農心)을 짓누르고 있었다. 22년째 배 농사를 짓고 있는 김재옥 씨(49)는 가지에 듬성듬성 달린 배를 따 조심스럽게 박스에 담았다. 그는 “그래도 태풍이 추석 지낼 것은 남겨 놓아 다행”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8월 28일 최고풍속 초속 59m를 기록한 볼라벤이 할퀴고 가면서 나주지역 배 과수원 2391ha의 80%가 낙과 피해를 봤다. 김 씨의 과수원(2.7ha) 배도 낙엽처럼 떨어졌다. 보통 20년 수령의 1그루에 150∼170개의 배가 열리는데 가지에 붙어있는 배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상처 난 낙과를 치울 틈도 없이 폭우를 동반한 덴빈이 이틀 만에 들이치면서 배는 썩어갔다. 세 번째 태풍 산바는 경남 쪽으로 빠져나가 낙과 피해가 크지는 않았지만 과수원은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김 씨는 “1년에 농자재 값과 인건비를 제외하고 6000만 원 정도 손에 쥐는데 올해는 1000만 원도 안 될 것 같다”며 걱정했다.
나주시 관정동과 공산면에서 배를 재배하는 권상준 씨(51)는 올해 겨우 6t을 수확했다. 그것도 깨지고 멍들어 배즙을 만드는 가공용으로 출하할 수밖에 없었다. 예년에는 60t 정도 수확해 농협 대출금을 갚고도 4000만 원 정도 남았는데 올해는 빚 갚기도 힘든 상황이다.
이처럼 시름에 젖어 있는 농가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어준 건 나주시와 향우회가 주도한 ‘낙과 사주기 운동’이었다. 처음에 농가들은 나주시가 낙과 배를 수매하겠다고 하자 시큰둥했다. 흠집 있고 당도가 떨어지는 배를 판매했다가 자칫 ‘나주배’ 이미지만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나주시는 11브릭스 이상의 배와 색깔이 좋은 것만을 선별해 수매하겠다고 약속했다. 브릭스는 물 100g에 녹아 있는 당의 g 수로 최상품은 12.5 이상이다. 낙과 배는 5kg 기준 한 상자에 택배비를 포함해 1만 원에 판매하기로 했다. 땀 흘려 가꾼 농가에는 ‘눈물의 판매 행사’였다.
시는 전국의 기관 단체, 기업체 등에 도움을 요청하고 재경향우회는 블로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낙과 사주기 운동을 알렸다. 나주시 농식품산업과에 ‘콜센터’가 설치되고 직원 8명이 매일 새벽까지 주문을 받았다. 낙과 배는 주문을 받은 지 5일 만인 이달 7일 모두 동이 났다. 전국에서 8만9060상자를 주문했지만 4만6402상자(232t)만 보냈다. 선별작업을 엄격하게 하다 보니 주문량을 다 채울 수 없었다. 권상준 씨는 “인건비와 농자재 값마저 올라 가뜩이나 힘든데 3개의 태풍은 ‘대재앙’이나 다름없었다”며 “낙과 사주기 운동이 아니었다면 재기를 꿈꾸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훈훈한 후일담도 들려왔다. 나주시와 자매결연한 서울 동대문구 아파트연합회는 대형차량에 1763상자를 실어 나르느라 배송이 늦어지자 구청으로부터 소형차를 지원받아 18개 아파트 단지를 돌며 직접 나눠줬다. 최의문 씨(53·나주시 왕곡면)는 “작고 못생긴 낙과뿐이라 미안했다”며 “이번 태풍으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십시일반’이라는 온정에 다시 일어설 힘이 생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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