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불산가스 누출사고 일주일… 황금빛 들녘 사라진 봉산마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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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 700m 화학폭탄 맞은듯 잎도 열매도 만지면 부서져

“아이고, 논이고 과수원이고 마을이 제 색깔을 잃어 버렸어예. 어디 성한 데가 있어야지예. 이게 어디 감나뭅니꺼. 우리 동네 가을이 얼마나 예뻤는데…. 살기가 싫어지고 그래예.”

9월 27일 발생한 경북 구미시 산동면 불산(弗酸·불화수소산) 가스 누출 사고의 직격탄을 맞은 봉산마을. 사고가 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이곳은 심각한 사고 후유증에 여전히 신음하고 있었다. 3일 만난 주민들은 “마을이 독가스를 뒤집어썼는데 이렇게 살아도 되느냐”며 애절한 표정으로 기자의 손을 잡았다. 노인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마을에는 담장 위에 뻗은 호박 줄기 이외에는 ‘녹색’이 보이지 않았다. 집 안 감나무, 비닐하우스 안의 포도 멜론 고추 대추나무 등 식물은 모두 바싹 말라 오그라들었다. 포도는 살짝만 건드려도 부스러졌다. 넓고 푸른 잎을 자랑하던 바나나 나무도 완전히 시들었다. 황금빛이어야 할 들판은 회색빛으로 바뀌었다. 한 주민은 “제초제를 여러 번 뿌려도 없어지지 않던 억새가 하루 만에 말라 버렸다”고 했다. 마을회관 앞에 모여 있던 주민들은 1991년 발생한 구미 낙동강 페놀 오염 사고의 악몽을 떠올리기도 했다.

불산 가스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농작물이 말라 죽는 장면을 확인한 주민들의 마음에는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몇몇 주민은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친척집으로 떠났다. 주민들은 마을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오염됐을 것이라며 손대기조차 꺼린다. 기자가 과수원의 마른 잎을 만지려 하자 “혹시 모르니 만지지 마라”라고 말릴 정도다.

주민들은 소가 잘 먹지 않아도, 개가 잘 짖지 않아도 ‘불산 가스 때문인가…’ 하며 불안에 떨었다. 사고가 난 공장과 거의 맞붙은 곳에서 포도과수원을 하는 김정준 씨(51)는 “주위가 온통 말라 버렸는데 사람이라고 괜찮겠느냐”고 했다. 사고 공장에서 반경 700여 m 안 봉산리 마을 논밭도 성한 곳이 없었다. 이삭과 잎, 열매가 말라 있었다. 고구마 배추 무 콩 같은 밭작물도 대부분 말라 죽어 수확할 것도 없지만 주민들은 내년과 그 이후를 더 걱정하며 발을 굴렀다. 땅이 오염됐을 텐데 씨를 뿌린들 제대로 자라겠느냐는 것이다. 김영호 씨(58)는 “수확을 해도 독가스를 뒤집어쓴 쌀을 누가 먹겠느냐”고 하소연했다.

건강 이상을 호소하는 주민도 늘고 있다. 속이 메스껍다거나 두통에 시달린다는 주민이 상당수다. 사고 발생 후 병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추석 연휴가 지나 약국을 찾는 주민이 대부분이다. 노인들은 사고 이후 소화불량으로 신음하고 있다. 150여 가구 250여 명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는 60∼80대가 70%를 넘어 건강이 나빠지는 주민이 더 생길 우려가 크다. 사고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구미소방서 대원 중에서는 피부 발진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주민들은 농작물 상황과 건강 상태에 대한 정밀조사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국가산업단지에서 사고가 발생한 만큼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를 상대로 피해 보상 소송도 낼 예정이다. 사고대책위원장인 박명석 이장(49)은 “피해 조사를 과수원이나 가축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 마을 전체의 생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미시와 경북도는 3일부터 봉산마을 등 사고 공장 주변 마을을 대상으로 대기와 수질, 농작물 오염 등 역학조사(건강장애 원인조사)와 가구별 피해 조사를 하고 있다.

불산은 염화칼슘이나 석회 같은 화학물질로 독성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후유증이 오래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동식물에게 직접 닿았을 경우 증세가 더 심각할 수 있다. 봉산마을 농작물이 말라 죽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제독(除毒)하지 않은 불산이 직접 닿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인체나 땅에 오래 축적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곧 사라지지도 않는 위험물질이다. 하기룡 계명대 교수(화학공학과)는 “적은 양의 불산에 노출됐을 때 건강 이상 증세가 금방 나타나지 않다가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며 “배출된 불산의 양을 파악해 정밀 조사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불산 ::

무색의 자극적 냄새가 나는 휘발성 액체. 독성과 침투력이 매우 강해 유리와 금속을 녹이는 성질을 갖고 있다. 녹물을 제거하는 데 주로 쓰인다. 공기와 결합하면 기체로 변한다. 체내로 흡수되면 호흡기 점막을 해치고 뼈를 손상하거나 신경계를 교란한다.

구미=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장영훈 기자 jang@donga.com  
#구미 불산사고#봉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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