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A 씨(28)는 한국에서 취업을 하려다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대기업과 금융회사, 공기업이 채용 과정에서 ‘인·적성 시험’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A 씨는 한국의 취업 준비생들이 인·적성 시험을 따로 공부하고 연습한다는 사실을 알고 더 놀랐다. “서점마다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대기업 인·적성 시험 대비 문제집이 쌓여 있더군요. 인성과 적성은 타고나는 것 아닌가요?”
인·적성 검사는 기업이 면접에 앞서 추구하는 인재상에 맞는 지원자를 골라내기 위해 만든 객관식 시험으로, 주로 직무 적성과 인성을 평가한다. 삼성그룹이 1995년 ‘SSAT’를 도입한 이후 LG, 한화, 두산 등 주요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소기업까지 인·적성 검사를 하고 있다.
A 씨 말처럼 인·적성이란 본래 타고나는 것이지만 요즘 취업문이 워낙 좁다 보니 대부분의 취업 준비생은 문제집을 사고 학원을 다니며 인·적성 시험 성적을 높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팔린 인·적성 준비 서적은 31만6900권. 올해에는 지난달까지 전년 동기 대비 18%가량 늘어난 27만5400권이 팔렸다. 온라인 취업정보 커뮤니티에는 ‘인·적성 스터디 회원을 모집한다’는 글이 매일 수십 건씩 올라오고, 취업컨설팅학원들은 인·적성 시험 대비 합숙 특강까지 한다. 한 온라인 학원은 최근 이틀간의 ‘족집게 특강’과 모의고사 2회분을 9만8000원에 판매했다. SK그룹에 입사 원서를 낸 대학생 이모 씨(24·여)는 “인성 평가 때 자신의 인성에 대해 일관되게 대답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나의 성격이나 습성을 미리 기록한 뒤 외우는 연습을 한다”고 했다.
정말 공부하면 인·적성 시험 성적이 오를까. 동아일보 취재팀은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의 인사팀과 함께 서점에서 문제집을 살펴봤다. ▼ 기업 측 “문제풀이 무의미” ▼
자사(自社) 입사 대비 문제집들을 꼼꼼히 살펴보던 인사팀 과장은 부록으로 묶어놓은 기출문제를 보고 “이제까지 한 번도 외부로 공식 유출된 적이 없는데 의아스럽다”며 혀를 내둘렀다. 기출 문제를 근거로 한 예상 문제에 대해 “문제은행에서 골라내는 게 아니라 매년 상·하반기 공채 때마다 문제 유형을 새로 개발하기 때문에 문제집을 푸는 게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많은 문제를 맞히기보다는 어떤 문제를 맞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예를 들어 인성평가에서 완벽주의자적 성격이 아닌 것으로 분석된 지원자가 모든 수학 공식과 한자 등을 달달 외워 적성 문제에서 만점을 받으면 오히려 평가에는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 그는 “인·적성 검사로 떨어뜨리는 인원은 하위 20% 미만”이라며 “인·적성 문제집을 풀 시간에 차라리 회사 관련 정보나 자신의 전공 분야를 공부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포스코 인사팀은 서점에 갔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포스코는 현재 대기업 가운데 드물게 적성평가를 실시하지 않는데도 서점과 온라인상에 ‘포스코 인·적성 대비 문제집’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인사팀 관계자는 “취업 경쟁이 치열하니까 장사하는 사람들이 별걸 다 만들어 판다”며 “우리도 신기하다”고 했다. SK와 KT 인사팀도 “인·적성 시험은 미리 대비한다고 눈에 띄게 점수를 올릴 수 있는 성격의 검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인·적성 문제 출제 기관들도 같은 견해다. 한국능률협회 관계자는 “정답 자체가 없기 때문에 문제집을 사보는 건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휴노 역시 “기업 인·적성 시험에 동일한 문항이 두 번 출제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 예상 문제를 푼다고 점수가 올라갈 것 같지는 않다”며 “문제집을 인·적성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들이 만들었는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박형철 머서코리아 대표는 “말이 시험일 뿐 실제 목적은 특정 기업의 직무와 문화에 맞는지를 보는 것”이라며 “맞느냐 틀리냐가 아니라 적합하냐 적합하지 않냐를 보는 과정이므로 스펙 쌓기의 일환으로 인·적성 고득점을 기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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