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후 경북 구미시 산동면 봉산리 마을. 한우 축사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던 박명석 이장(49)이 힘없는 목소리로 ‘불산 좀 마셨다고 굶길 수 없다’며 넋두리했다. 그는 한 달 전 발생한 불산 누출사고 때문에 마을을 떠나 임시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그래도 소들 끼니 걱정에 매일 오전 오후 하루 2번씩 축사를 찾는다. 주인의 모습에 한우 55마리는 앞다퉈 ‘음메∼’ 하고 울음소리를 냈다. 이렇게 정성으로 키운 소를 ‘불산 공포’ 때문에 모두 도살해야 한다는 당국의 지시에 박 씨의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 구제역도 이겨낸 가족 같은 소를…
그는 이날 평소보다 많은 사료와 여물을 먹였다. 곧 도살된다니 ‘더 해줄 건 이것뿐’이란 생각에서다.
“죽을 날 받아놓았잖소. 배불리 먹이기라도 해야제…. 우량 고급 한우 만들어보겠다고 큰돈 주고 사오고 구제역 때도 끄떡없었던 녀석들인데….”
박 이장은 30년 가까이 소를 키웠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낼 줄 몰랐다며 가슴을 쳤다. 1900m²(약 600평) 규모의 축사는 사고가 난 공장에서 100여 m 떨어져 있다. 사고 당시 불산을 덮어쓴 소들은 한동안 침과 콧물을 흘리고 극심한 식욕 부진 증상을 보였다. 하지만 한 달이 된 지금은 그때와 전혀 다르다. 예전처럼 잘 먹고, 움직임도 활발하다. 평상시처럼 마리당 하루 8kg 정도의 사료를 부지런히 먹고 있다. 사고 이후 한 달간 사료 값만 650여만 원이 들어갔다.
정부합동조사단 발표에서도 박 이장의 소들은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피해지역 22개 농가의 소 염소 닭 등 142마리에 대한 표본조사에서도 모두 이상이 없었다. 불산의 불소 성분은 가축 체내에 들어가면 불화칼슘, 불화마그네슘 등의 형태로 존재하거나 배출되는데 그 수치도 다른 지역의 정상 가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부 조사단은 ‘식품 건전성’ 차원에서 모두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불산에 노출된 가축이 도축돼 유통되면 전체 축산물 시장에 혼란과 불안감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농민들은 정든 소를 떠나보내야 하는 안타까움에 답답해하고 있다. 박 이장은 “1등급 받으려고 어릴 때부터 수입한 마른 풀과 비타민제까지 먹여 키웠다”면서 “도살하면 전국 평균 시세로 취급받을 텐데 마리당 최소 80만 원 이상 손해를 볼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 단지 불안감 해소 차원에서 몰살
현재 신고가 접수된 피해지역 가축은 3622마리. 개가 1738마리로 가장 많고 소 951마리, 닭 588마리 등이다. 별도로 양봉은 321통에 이른다. 정부는 비식용 말이나 사냥용 개 등을 제외하고 모든 가축을 도살할 방침이다. 불산에 노출됐는지 분명하지 않은 가축도 다수이지만 구미에 산다는 이유로 떼죽음을 피하지 못할 처지다.
동물보호단체에서는 “일괄적인 폐기 계획을 철회하라”며 정부 방침에 반발하고 있다. 2년 전 구제역이 전국을 휩쓸었을 때 무려 996만 마리의 가축이 매몰됐다. 일부는 산 채로 매장당해 큰 충격을 줬다. 녹색연합과 동물자유연대,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등은 최근 공동 성명에서 “전염병이나 대형 사고 때 피해 입은 동물을 인도적으로 대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물자유연대 이형주 팀장은 “모든 가축을 무조건 폐기할 것이 아니라 불산 노출 여부를 정확히 확인한 뒤 폐기 처분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는 불산 노출 여부를 명확히 가려내기 쉽지 않고 다소 광범위하더라도 구미 지역 축산물을 모두 폐기해야 축산물 불안감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정부 관계자는 “국민이 느낄 불안감도 이번 처분의 중요한 이유”라며 “(산 채로 매장했던) 구제역 때와 달리 충격을 줄이기 위해 안락사 시킨 뒤 ‘렌더링(고압스팀으로 멸균처리)’ 방식으로 폐기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가축과 농작물 보상을 위한 피해 평가는 이르면 이번 주에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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