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가 미국 전역에서 위조 수표를 만들어 뿌렸지만 흔적도 못 찾은 연방수사국(FBI)이 분에 찬 비명을 질렀듯, 지난 수년간 한국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는 “또 77246이야?”라는 고함이 빗발쳤다.
2005년 전국에서는 이 번호가 찍힌 옛 5000원권 위조지폐가 4775장이나 발견됐다. 위조 솜씨가 뛰어나 시장이나 편의점 등 유통단계에서는 거의 신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돌고 돌아 금융기관에 입금된 이후에야 위조 사실이 확인된 탓에 경찰은 어디서 주로 유통됐는지, 몇 살쯤의 남자인지, 여자인지, 범인의 흔적도 찾질 못했다.
‘77246’ 위폐의 악몽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달 초에 한국은행에서 수거한 지폐 중에 1장이 발견되는 등 구권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올해에도 30여 건이 추가됐다. 경찰은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지만 범인의 행적은 처음 이 위폐를 등장시킨 2005년 이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리무중이다.
‘77246’ 이전의 국내 위폐는 컬러프린터로 종이 한 장에 양면을 복사하는 조잡스러운 수준이었지만 ‘77246’은 달랐다. 맨눈으로는 구별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발견된 위폐 중에서 가장 진짜 지폐와 유사한 색을 띠었다.
범인은 당시 5000원짜리 지폐의 위조방지장치가 신권에 비해 취약한 점을 노렸다. 1983년 6월 처음 발행되기 시작한 옛 5000원권은 빛에 비춰보면 숨겨진 율곡 이이의 초상과 태극무늬가 나타나는 위조방지장치만 적용됐다. 1만 원권에 새겨진 부분노출 은선도 5000원권에는 없었다. 범인은 진짜 지폐와 촉감이 비슷한 특수용지에 잉크젯 프린터로 5000원권 앞뒷면을 각각 복사한 뒤 은색 종이에 복사한 율곡 이이 그림을 중간에 끼워 합치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빛에 비춰도 율곡 초상이 보이니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시중에서 신고하지 않고 전문가가 검사하는 금융기관에서만 ‘77246’을 신고한 이유다.
2006년 6455장, 2007년 6461장, 2008년 8667장. 매년 ‘77246’은 빠르게 증가했다. 2008년 만 원권과 1000원권 위폐가 각각 5825장, 372장이 발견돼 전년 대비 30% 이상 줄었지만 옛 5000원권 위폐 발견건수는 25% 정도 증가했다.
‘77246’ 위폐가 처음 발견된 2005년부터 지금까지 4만5838장이 적발됐다. 같은 기간 동안 신·구권을 모두 합쳐 발견된 5000원권 위폐의 약 92%다. 2억3000여만 원어치다. 2006년 1월 홀로그램, 색변환 잉크, 미세 문자, 돌출 은화 등 첨단 장치를 적용한 신권이 발행된 후 구권 사용은 점차 줄었지만 여전히 이 위폐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경찰과 국가정보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한국은행 한국조폐공사 등은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단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한국조폐공사가 위폐의 잉크와 재질을 분석하고 국과수는 지폐에 남은 땀을 이용해 유전자 분석까지 시도했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탓에 쓸 만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31일 “‘77246’ 위폐는 전국적으로 퍼져있어 정확히 얼마가 유통됐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며 “시중에 깔린 것을 합하면 그 규모는 훨씬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과수는 공통일련번호 ‘77246’을 가진 위폐를 모두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관계기관에서는 기술이 뛰어난 이 위조범이 신권에 손을 대지 않을까 우려하는 기색도 보인다.
구권의 사용이 거의 사라진 지금 ‘77246’ 위폐 사건은 범인을 잡지 못한 완전범죄로 남을 확률이 커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범인이 번호를 바꾸지 않고 굳이 ‘77246’이라는 한가지로만 위폐를 만든 의문점도 풀리지 않게 된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까지 이 번호를 사용한 신권 위폐는 신고되지 않았다”며 “위폐인지 의심스러우면 만지지 말고 곧바로 경찰로 신고해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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