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펜을 굴려 한 달 용돈 계획을 짜도 답이 안 나왔다. 열일곱 윤모 양은 입술보호제를 사려던 계획을 다음 달로 미뤘다. 고등학생인 윤 양이 경기 이천시의 아동복지시설 성애원에서 지내며 받는 용돈은 월 2만 원. 한창 꾸미고 싶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여고생에게 부족해 보이는 액수다.
그런데 윤 양은 31일 “꼭 써야 할 곳이 있다”며 비상금 중 2000원을 꺼내놓았다. 초등학생 이모 군(12)도 저금통을 털어 500원을 냈다. 이달치 용돈의 10%다. 이렇게 성애원 아이들 45명이 원장실에 놓고 간 돈은 모두 3만5000원. 동생 삼기로 한 인도 빈민촌의 조스나 조세(9·여)에게 보낼 돈이다. 아이들이 얼굴도 모르는 제3세계 어린이의 수호천사가 되기로 결심한 사연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애원엔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18세 이하 아이들이 모여 산다. 윤 양은 부모의 얼굴도 모른다. 일시보호시설에서 쥐여준 과자 한 봉지를 들고 세 살 때 이곳에 온 게 어렴풋한 첫 기억이다. 몇 해 전 부모가 이혼하며 성애원으로 온 박모 양(16)은 친구들이 생일을 물어도 얼버무렸다. 파티를 열어줄 부모님이 곁에 없어서였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라도 보는 날엔 박탈감을 속으로 삭여야 했다. 아이들의 엄마 역할을 하는 신경림 원장(56)은 고민이 깊었다. 아이들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빈곤하다’는 생각에 휩싸이는 게 걱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은 성애원에 종종 찾아와 봉사활동을 하는 가수 션(본명 노승환·40)과 탤런트 정혜영(39) 부부로부터 가난 탓에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제3세계 아이들의 얘기를 들었다. ‘우리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들은 들떴다. 2009년 12월 회의를 열어 기부를 결정했다. 용돈이 부족해진다는 점에 망설임도 있었지만 결과는 만장일치였다. 다음 날 아이들이 신 원장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지폐 열다섯 장에 100원짜리 동전 7개.
돈은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을 통해 조스나에게 전달됐다. 처음엔 후원금 500원도 아까워하던 몇몇 아이는 조스나가 비뚤비뚤한 힌두어로 보내온 감사 편지를 받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군것질로 써버렸던 돈이 조스나에겐 수업료이자 예방접종비용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적다고 느꼈던 용돈을 오히려 알뜰하게 쓰는 효과도 생겼다. 성애원 아이들은 매달 후원금 3만5000원을 빼먹은 적이 없다.
그 후 아이들의 일상에도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윤 양은 장애인 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게 습관이 됐다. 이전엔 봉사활동 점수를 채우려고 형식적으로 가던 곳이다. 올 초엔 윷놀이대회 우승 상금 10만 원으로 떡볶이 재료를 사들고 장애인 쉼터를 찾아 요리 솜씨를 선보였다. 윤 양은 “100점짜리 성적표를 받았을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손성민(가명·16) 군은 지난달 추석 연휴에 방글라데시 빈곤층 아이들을 직접 만날 기회를 얻었다. 하루 한 끼를 간신히 해결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현지 아이들의 모습은 손 군의 마음을 흔들었다.
“가진 게 없어도 마음은 가난하지 않은 ‘마음 부자’가 될 거예요.” 나눔을 통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성애원 아이들의 말이다. 컴패션 콜센터(02-740-1000)와 홈페이지(www.compassion.or.kr)를 통하면 성애원 아이들의 나눔활동에 동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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