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하지도 짙지도 않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 은은한 향이 숲에서 퍼져 나왔다. 14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상효동 돈내코 하천 부근 한란(寒蘭) 자생지. 최근 활짝 꽃을 피운 한란에 얼굴을 가까이 대자 순간 아찔했다. 인공적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독특한 향이 온몸에 퍼졌다. 상큼하면서도 그윽한 향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신선(神仙)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자홍색, 연두색 빛을 발하며 학이 날개를 펼친 듯, 기러기가 열 지어 날아가듯 고고하면서 우아한 자태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름드리 구슬잣밤나무 주변에 수십 촉이 한꺼번에 꽃을 피웠다. 바위를 감싼 콩짜개덩굴, 빨간 열매를 맺은 자금우 등과 벗하며 장관을 이뤘다.
무분별한 도채와 남획 등으로 자취를 감췄던 한란이 극진한 보호 끝에 되살아난 것이다. ‘제주 한란’은 1967년 단일 식물 종으로는 처음으로 천연기념물 제191호로 지정됐지만 도채 등으로 수난이 끊이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한란자생지 38만9879m²(천연기념물 제432호)에서 관찰할 수 있는 한란은 50여 촉에 불과했다. 1999년 한란 생태계학술조사 용역이 이뤄진 때부터 본격적인 보호활동이 펼쳐졌다. 서귀포시 직원들이 밤낮으로 자생지를 지켰고 주변 감귤과수원을 매입해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았다. 2001년부터 한란이 하나둘 번식하더니 지금은 2500여 촉으로 늘었다. 자연 상태를 유지한 결과 뿌리, 씨앗 등으로 퍼진 것이다. 변이종을 포함해 한란 11품종이 자생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미기록 품종도 있다.
서귀포시는 3m 높이의 보호철책을 설치하고 무인경비시스템을 가동했다. 1년 동안 촬영을 통해 ‘굴파리’가 꽃대에 알을 낳아 꽃대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한란의 개화를 망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내기도 했다. 한란은 전형적인 동양란으로 잎의 자세와 향기, 다양한 꽃 색깔 등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가을이나 초겨울에 꽃을 피운다. 일본 대만 중국 등지에도 서식하고 국내에서는 제주에만 자생한다.
서귀포시 윤봉택 문화재담당은 “국내외 동양란 가운데 제주 한란을 최고로 친다”며 “어렵게 자생지를 회복한 만큼 지속적인 보호활동으로 더이상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서귀포시는 한란자연생태원, 전시관, 방문자센터 등을 비롯해 관찰로를 만들어 내년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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